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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늘도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는데, 나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시계는 벌써 열한 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이 줄다리기를 한다. 그저 눈을 감고 세상을 잊고 싶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침대에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는다. 알림이 수십 개. 답장해야 할 메시지들, 확인해야 할 이메일들, 마감 기한이 다가오는 일들… 화면을 보다가 그대로 던져버린다. 오늘만큼은,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의욕이 넘쳤는데.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저녁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남아 나를 짓누른다.

    천장의 작은 균열을 바라본다. 저 균열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지난번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쩌면 나도 저렇게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금이 가 있는 건 아닐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살랑거리게 한다. 저 바람은 어디서 왔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한숨일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기분으로 오늘을 보내는 사람의 한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긴 숨결.

    유리잔에 남아있는 물을 바라본다. 반쯤 차 있어? 아니면 반쯤 비어 있어?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 마음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텅 비어 있는 걸까, 아니면 뭔가로 가득 차 있는 걸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사실은 너무 많은 것들을 동시에 느끼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읽다 만 책들이 쌓여있다. 며칠 전만 해도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지금은 손이 가지 않는다. 단어 하나를 읽는 것조차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창밖을 내다본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속도로 움직인다. 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처럼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을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지만, 속으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런 날들이 있다. 그냥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 열정도, 의욕도, 꿈도 잠시 접어두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고 싶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처럼 느껴지는 날.

    머릿속에서는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끊임없이 재생된다. 하지만 몸은 그 어떤 움직임도 거부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온다. 이 순간만큼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안이 된다.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린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나만 멈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이 멈춤도 필요한 시간일지 모른다. 무언가를 쉬었다 가기 위한,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 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도 결국엔 지나가겠지.

    손가락 끝으로 이불의 질감을 느낀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안전하다. 이 작은 공간, 이 순간이 나에게 주는 안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이제는 침대 끝자락에 닿아 있다.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흘려보낸 시간. 그래도 괜찮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 때가 있으니까.

    눈을 감는다.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함께, 오늘 하루를 그냥 보내기로 한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오늘이 있어야, 무언가를 하고 싶은 내일이 올 수 있을 테니까.

  • 비

    아침 6시 30분, 나는 언제나처럼 알람 소리가 울리기 5분 전에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내 안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음악이 만들어내는 푸른빛 공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트럼펫 소리가 내 의식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상하지,”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악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을까.”

    창밖으로 이제 정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아주 작은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잊혀진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나는 열다섯 살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비 오는 날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던 날. 그날의 비 냄새와 책 냄새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상하게도 첫사랑의 기억도 그날의 비와 함께 묶여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내게 남긴 흔적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인생도 이런 맛이 아닐까. 처음에는 쓰지만, 천천히 맛보면 그 안에 복잡하고 미묘한 풍미가 있다. 나는 또 다른 모금을 위해 컵을 들어올렸다.

    책상 위에는 어제 밤늦게까지 읽다 만 카프카의 ‘변신’이 놓여 있었다. 그레고르가 거대한 벌레로 변한 이야기. 때로는 나도 그런 기분이 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카프카와 달리, 나의 변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다.

    “변화란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같은 강이라고 부른다. 내가 열다섯 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같은 의식의 흐름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의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비 오는 날이면 항상 같은 말씀을 하셨다.

    “비는 하늘의 선물이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의 흐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들이 비처럼 내리고, 그것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결국 바다로 흘러간다.

    시계는 이제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잠시 더 비를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 고양이의 눈빛이 특별히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양이에게는 비가 그저 비일 뿐, 어떤 은유나 상징이 아닌 것이리라.

    “단순함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생각했다.

    커피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나는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상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어제의 내가 아니듯이, 오늘의 나도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의식의 흐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도시의 구름은 내면의 비를 부르고, 그 비는 다시 의식의 강을 채운다. 그리고 그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어디론가.

  • 낯설게 하기: 일상과 예술 속 새로운 시선

    낯설게 하기: 일상과 예술 속 새로운 시선

    매일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점점 투명해진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동작, 출근길에 마주치는 건물들, 손에 쥐는 스마트폰까지.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고’ 지나친다. 이런 상황에서 ‘낯설게 하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일상에 대한 자동화된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остранение)’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예술의 핵심 기능이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것.

    음악에서는 어떨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생각해보자.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앉아 한 음도 연주하지 않고 4분 33초 동안 침묵하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침묵’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콘서트홀의 기침 소리, 의자 삐걱거림, 에어컨 소리까지 모두 음악이 된다. 평소엔 무시되던 소리들이 갑자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건축에서는 프랭크 게리의 작품들이 일상적 공간 개념을 전복시킨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전통적인 직선과 수직 구조에서 벗어나 마치 금속 파도가 굳어버린 듯한 형태로 건축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흔든다. 일상적 건축물과의 단절을 통해 우리는 ‘건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진에서는 앙드레 케르테스가 일상의 사물을 기울이거나 왜곡된 각도에서 촬영함으로써 평범한 풍경을 초현실적으로 변형시켰다. 그의 ‘뒤틀린 포크’나 ‘멜랑콜리’와 같은 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수천 번 봤던 사물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미술에서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단순한 파이프 그림 아래 역설적인 문구를 배치함으로써 이미지와 실재, 재현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자동화된 인식을 흔든다. 그림 속 파이프는 정말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충격적인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낯설게 하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의 골목길이 어릴 때보다 좁게 느껴질 때, 혹은 매일 지나치던 거리의 한 구석에서 처음 보는 작은 꽃을 발견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세상을 새롭게 본다.

    어쩌면 예술의 핵심은 바로 이 ‘낯설게 하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자동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은 거창한 예술 작품뿐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전환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매일 같은 길로 출근하던 사람이 하루는 다른 길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세상은 다시 낯설고 생생해질 수 있다.

    낯설게 보기는 결국 깨어있는 삶의 방식이다. 자동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 예술은 그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안내자일 뿐이다.​​​​​​​​​​​​​​​​

  •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

    어린 시절, 어른들은 늘 말씀하셨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 말을 믿고 우리는 밤새워 공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약속은 희미해져만 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다리 걷어차기. 자신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후, 뒤따라오는 이들이 같은 방법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투영하고 있다.

    며칠 전, 한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길 건너편의 학원가를 보게 되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불이 환하게 켜진 학원의 창문들. 그 속에서 미래를 꿈꾸며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들은 분명 누군가의 말을 믿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노력이 미래를 바꾼다”라는.

    하지만 이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어떠한가?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이제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들어간다 해도 고용의 안정성은 보장받기 어렵다.

    더 뼈아픈 현실은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시대적 흐름이 아니라, 앞서 기회를 얻은 세대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부동산을 여러 채 소유한 이들은 집값 하락을 우려해 규제 완화를 외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다. 이미 안정된 직장에 자리 잡은 이들은 신규 채용보다 기존 직원의 복지 향상에 더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주, 오랜 친구를 만났다. 대기업에 다니는 그는 최근 회사의 채용 축소 방침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사가 어렵다고 하더라고. 근데 사실 우리 부서만 해도 일은 넘쳐나는데 인력은 늘리지 않아. 기존 직원들의 연봉을 올려주는 대신 신규 채용을 줄이는 거지.” 그의 말에서 나는 또 다른 사다리 걷어차기를 발견했다.

    세대 간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간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기회를 독점했다”고 반박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일 테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갈등이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한 노인분이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소리쳤다. 그 젊은이가 야간근무를 마치고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차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세대의 충돌이 그 좁은 공간에 응축되어 있었다.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의 기회를 가로막으면, 결국 그 사회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청년들의 좌절은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고령화 사회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작점은 명확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다. 각 세대가 서로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어떤 정책적 해결책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어제 저녁, TV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젊은 창업자와 은퇴한 베테랑 직장인이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젊은이의 창의성과 노인의 경험이 만나 시너지를 발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협력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메시지였다.

    사다리는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고 나누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튼튼하고 넓은 사다리를 함께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회적 연대가 아닐까? 한 사람이 혼자 올라간 높이보다, 모두가 함께 올라간 높이가 더 의미 있는 법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밤은 깊어간다. 학원가의 불빛은 여전히 밝고, 젊은이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불태운다. 그들의 꿈이 사다리 걷어차기로 인해 좌절되지 않기를, 그들이 올라간 후에는 더 튼튼한 사다리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 골든 아워

    골든 아워

    해가 지기 전, 도시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운전대를 꽉 쥐고 있던 나는 빨간색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 앞에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한 소녀였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황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얼추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하얀색 이어폰을 꽂은 채 리듬에 맞춰 살짝 몸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문득 나의 저 나잇대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저렇게 음악에 빠져 세상을 잊곤 했었지. 그때는 미래가 무한히 넓게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가능성이 내 앞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저 선택만 하면 됐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소녀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어떤 가벼움이 있었다. 아직 세상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가벼움.

    나는 그녀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눈으로 쫒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황금빛 햇살 아래, 그녀의 실루엣이 점점 멀어져 갔다.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전, 문득 내가 매일 지나치는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나치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순간, 그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서로의 삶에 들어와 있다.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저 소녀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녀의 꿈은 무엇일까? 그녀의 이어폰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을까?

    도시의 황금빛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더 짙은 파란색으로 물들었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리고 저녁 공기를 들이마셨다. 살짝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갑자기 내 앞에 펼쳐진 도로가 무한히 길게 느껴졌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달리다가, 때로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순간들에서 의미를 찾는 것.

    오늘의 골든 아워는 이제 곧 끝나겠지만, 내일 또 다른 골든 아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또 어떤 순간이 내 기억에 남을까? 어떤 얼굴이, 어떤 장면이 내 마음을 움직일까?

    차를 몰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 지었다. 때로는 가장 평범한 순간이 가장 특별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횡단보도를 건너던 소녀의 모습은 내 마음 한구석에 작은 빛으로 남을 것이다.​​​​​​​​​​​​​​​​

  •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

    새벽 3시, 모니터의 푸른빛만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다.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버그는 끝없이 나타난다. “조금만 더”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코딩이 어느새 밤을 삼켜버렸다. 프로그래머의 시간은 이렇게 증발한다.

    프로그래밍의 세계에서 시간은 기묘한 존재다. 한 줄의 코드를 작성하는 데 1분이 걸리지만, 그 코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데는 몇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플로우 상태’에 빠지면 5분이 5시간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까다로운 버그를 해결하려 할 때는 5시간이 5분처럼 느껴진다.

    내 경력 초기, 나는 시간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정을 세우고, 포모도로 기법을 활용하고, 최신 시간 관리 앱을 설치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은 예측 불가능한 예술이다. 간단해 보이는 기능이 기술적 부채의 미로로 이어지고, ‘5분이면 끝날’ 작업이 하루 종일 잡아먹는다.

    시간은 프로그래머에게 가장 귀중한 자원이자 가장 큰 적이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코드를 작성하면서도, 그 코드를 작성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자동화에 몰두하여 “이 작업을 자동화하는 데 10시간이 걸리지만, 매일 30초를 절약할 수 있어!”라고 자부하며, 그 투자가 언제 회수될지는 계산하지 않는다.

    경험이 쌓이면서 깨달았다.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는 단순히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의 예술이다. 코드와 씨름하는 시간, 동료와 소통하는 시간,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재충전하는 시간 사이의 균형.

    가장 큰 깨달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중요성이었다. 화면을 응시하며 문제 해결에 막막해할 때, 잠시 자리를 떠나 산책을 하거나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이 해결책을 찾는 지름길일 때가 많다. 뇌가 백그라운드에서 작업을 처리하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다.

    또한 ‘완벽’과 ‘충분히 좋음’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코드를 최적화하고 모든 엣지 케이스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로는 ‘작동하는’ 코드를 제출하고, 다음 과제로 넘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프로그래머로서 시간 관리의 역설은, 코드를 작성하지 않는 시간이 더 나은 코드를 만든다는 것이다. 충분한 휴식, 규칙적인 운동, 취미 생활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생산성의 필수 요소다. 번아웃된 프로그래머는 좋은 코드를 쓸 수 없다.

    결국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는 기술적 도전만큼이나 개인적 여정이다. 자신의 리듬을 이해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속 가능한 페이스를 찾는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코드와 삶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이제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내일의 나를 위해, 지금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침대로 향할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은 결국 자기 자신이니까.

  • 특별할 것 없던 날의 특별한 기억

    특별할 것 없던 날의 특별한 기억

    가끔은 특별할 것 없는 순간이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마치 뇌의 어딘가에 작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열아홉 살 여름이었을 것이다. 아니, 스물한 살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아직 대학생이었고, 세상의 복잡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남천동의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블랙커피를, 그녀는 레몬티를 마시고 있었다. 오후 3시 무렵이었고, 카페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이 테이블 위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글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던 셔츠는 기억한다. 연한 파란색, 마치 5월의 하늘같은 색이었다.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재즈에 관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우리가 읽은 책에 관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무의미한 일상에 관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대화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앞으로 몸을 기울여 차를 마시려 할 때였다. 셔츠의 위쪽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그녀의 가슴이 살짝 보였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었다. 단지 우연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을 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눈동자는 불가피하게 그곳으로 이끌렸다. 마치 블랙홀의 중력처럼,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그녀의 피부는 우유처럼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검은색 브래지어 끈이 살짝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우주의 비밀을 목격한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에로틱한 순간이면서도 동시에 묘하게 순수한 경험이었다.

    “왜 그래?” 그녀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갑자기 입이 말랐다.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사실 그녀의 가슴을 본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건 단지 표면적인 사건이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라 경외감에 가까웠다. 인간의 몸이 가진 아름다움, 그리고 그 순간의 우연성이 만들어낸 마법 같은 찰나였다.

    나는 그 후로도 여러 여자들을 만났고, 더 직접적이고 친밀한 경험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날 카페에서의 기억은 이상하게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아직 세상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그저 젊음의 감수성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른다.

    종종 생각한다. 그녀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저 평범한 오후의 차 한 잔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멈춘 순간이었다.

    인생은 이런 작은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저 지나가버릴 사소한 순간들. 하지만 때로는 그 사소한 순간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한다. 마치 오래된 재즈 레코드의 긁힌 부분처럼, 반복해서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 나는 다른 카페에서 비슷한 파란색 셔츠를 입은 여자를 보았다. 순간 그날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환영이었다. 과거의 기억은 언제나 현재에 투영되지만, 결코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나는 더 당당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진심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만 나아간다. 마치 시계 바늘처럼.

    가끔, 아주 가끔, 조용한 밤에 혼자 있을 때면 그날의 기억이 찾아온다. 연한 파란색 셔츠, 검은 브래지어 끈, 그리고 우연히 드러난 피부의 일부. 그것은 이제 현실이 아닌 꿈의 영역에 존재한다. 하지만 꿈도 때로는 현실보다 더 생생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한다. 테이블 너머로 슬쩍 보였던 그녀의 가슴, 그리고 그 순간 느꼈던 경외감.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의도하지 않게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순간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우리의 눈길.

  • 봄날의 창가에서

    봄날의 창가에서

    창 밖으로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에 젖어든다. 봄날의 나른한 오후, 이 한적한 카페의 창가에 앉아 나는 무심코 바깥세상을 관찰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내 테이블 위에 부드럽게 내리쬐고, 풍부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녀가 나타났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그녀의 연보라색 원피스 자락이 춤을 추듯 나풀거렸다. 어깨까지 살포시 내려앉은 밤색 머리카락은 햇살에 반사되어 금빛으로 빛났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느긋함이 있었다. 조급함도, 서두름도 없이 오직 자신만의 리듬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했다.

    한 손에는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근처 꽃집에서 막 산 것 같은 들꽃 다발이었을까. 연분홍색과 연보라색이 섞인 꽃들이 그녀의 원피스와 묘하게 어울렸다. 다른 한 손으로는 때때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여성스러웠다.

    그녀의 옆모습은 또 얼마나 인상적이었던가. 조금은 높은 콧대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입술, 그리고 긴 속눈썹 아래 빛나는 눈동자. 그녀의 표정에는 어딘가 가볍게 웃고 있는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미소 짓는 모나리자처럼.

    그녀가 카페 앞을 지나갈 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우리의 시선이 일순간 마주쳤을까? 그 순간 나는 숨을 죽였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후 미소를 띠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저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유리창을 바라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면서, 나는 문득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 꽃다발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일까, 아니면 그저 자신을 위한 작은 선물일까? 그녀의 발걸음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인생은 참 이상하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면서도 대부분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특별한 이유 없이도 한 사람의 모습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는 순간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어떤 기억이나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계속해서 변한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노부부가 천천히 걸어오고, 그들이 지나간 뒤에는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이가 나타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여전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다.

    다시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니, 어느새 미지근해진 커피의 쓴맛이 혀끝에 맴돈다. 따스한 봄날의 햇살과 함께 나른함이 몸을 감싼다. 문득 나도 이 카페를 나서서 그녀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어쩌면 그 길의 끝에서 내가 찾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가슴 한편에서 일렁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본다. 그녀는 이제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녀가 남긴 인상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마치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리고 봄꽃처럼 아름답게.

    우리의 삶은 이런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지나가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찰나의 연속. 봄날의 나른한 오후, 한적한 카페의 창가에서 나는 오늘도 그런 순간을 선물 받았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오늘 그녀는 한 사람의 마음속에 잊히지 않을 봄날의 풍경이 되었다.

  • 프로젝트 관리에 관하여

    프로젝트 관리에 관하여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다. 탄생하고, 성장하며,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화한다. 프로젝트 관리자로 수년간 일하면서 나는 코드만큼이나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프로젝트 관리를 맡았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철저한 간트 차트와 세부적인 일정표가 성공의 열쇠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예상치 못한 기술적 난관, 변화하는 요구사항, 그리고 팀원들의 다양한 작업 스타일은 내 완벽한 계획을 흔들었다.

    한 대형 시스템 개발 프로젝트에서의 일이다. 출시 2주 전, 핵심 기능에서 심각한 버그가 발견되었다. 팀은 밤낮없이 문제 해결에 매달렸지만, 해결책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압박감 속에서 팀원 간 갈등이 생겼고, 의사소통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때 나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관리는 단순히 일정과 자원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감정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팀원들에게 휴식을 주고, 각자의 우려를 경청했다. 문제를 더 작은 부분으로 나누어 점진적으로 접근했다. 놀랍게도, 분위기가 바뀌자 해결책도 빠르게 나타났다.

    소프트웨어 개발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코드는 논리적이지만, 그것을 만드는 과정은 창의적이고 때로는 혼란스럽다. 가장 유능한 개발자도 정확한 시간 추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90% 완료’ 상태가 몇 주, 때로는 몇 달을 끌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유연성의 중요성을 배웠다.

    애자일 방법론의 도입은 이런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거대한 계획 대신, 우리는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매일 아침 짧은 스탠드업 미팅에서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장애물을 즉시 식별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문제가 커지기 전에 조기에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가장 큰 교훈은 소통의 힘이었다. 기술적 언어와 비즈니스 언어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 개발자와 이해관계자 간의 기대치를 조율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이었다. 개발팀의 기술적 제약과 비즈니스 팀의 시장 압박, 두 관점을 모두 이해하고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성공적인 프로젝트 관리는 기술과 인간성의 균형을 찾는 예술이다. 최첨단 개발 도구와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결국 프로젝트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다. 개발자의 열정을 불태우고, 그들이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진정한 프로젝트 관리자의 역할이다.

    지금도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나는 간트 차트보다 먼저 팀의 얼굴을 살핀다. 그들의 강점과 약점, 동기와 우려를 이해하는 것이 어떤 계획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코드는 결국 사람이 만든다.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관리의 핵심은 바로 이 단순한 진리를 기억하는 것에 있다.

  • 전화, 그 이상한 물건에 대하여

    전화, 그 이상한 물건에 대하여

    나는 전화를 싫어한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특별히 숨길 생각도 없고, 부끄러워할 생각도 없다. 그저 평범한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아마도 이 세상에는 나처럼 전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들 중에는. 우리는 컴퓨터와 대화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사람과의 대화는 때때로 불편하게 느껴진다. 코드는 명확하고 논리적이지만, 사람의 말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도 전화가 울렸다. 오후 세 시 십오 분쯤이었을까.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새로운 알고리즘을 구상하고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서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을 테지만, 그날은 중요한 클라이언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내 목소리는 항상 전화 속에서는 낯설게 들린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쓰고 있는 것처럼.

    “안녕하세요, ○○기업의 △△입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마치 오래된 재즈 바에서 들리는 색소폰 소리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기다리던 전화도 아니었다.

    전화의 문제점은 바로 그것이다. 상대방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 오직 목소리만으로 상대방의 의도나 감정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 프로그래밍에서라면 나는 디버거를 사용할 수 있다. 코드의 모든 상태를 확인하고, 문제가 발생한 정확한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전화 통화에는 디버거가 없다. 그저 내 감각에 의존해야 할 뿐이다.

    코드를 작성할 때는 시간을 들여 생각할 수 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전화 통화에서는 그럴 수 없다. 한 번 말한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마치 커밋 후에 푸시 버튼을 눌러버린 것과 같다.

    아주 오래 전, 나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세 번이나 번호를 눌렀다가 바로 끊어버렸다. 네 번째 시도에서 겨우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여보세요?”라는 말만 세 번 들었을 뿐이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어버렸다. 소프트웨어의 무한 루프처럼, 나의 뇌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더 선호한다. 글로 쓰면 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다. 적절한 단어를 선택할 시간이 있다. 마치 코드를 작성하듯이, 하나하나 정확하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내 전화 공포증은 버그를 발견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내가 작성한 코드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내가 작성한 함수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반환할 때의 당혹감. 마치 빈 우물 속에 돌을 던지고, 그 돌이 바닥에 닿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과 같은 불안감.

    “○○님, 계십니까?”

    전화 속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네, 있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 이야기는 항상 쉽다. 정해진 주제, 정해진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잘 정의된 함수처럼. 입력과 출력이 명확하다. 하지만 그 외의 전화는 항상 어렵다. 특히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나 가족과의 전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항상 헷갈린다. 그것은 마치 문서화되지 않은 API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전화 공포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화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필요할 때는 사용한다. 마치 좋아하지 않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할 때처럼,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때로는 그런 불편함이 프로그래밍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불편함은 새로운 해결책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그래머에게 있어서 새로운 해결책이란 소중한 자산이다.

    어쩌면 나는 언젠가 전화 공포증을 위한 앱을 만들지도 모르겠다. 인공지능이 대신 전화를 받고, 중요한 내용만 텍스트로 정리해주는 그런 앱. 그렇게 되면 나 같은 사람들도 조금은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전화가 울린다.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수화기를 든다. 그리고 또 다른 코드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