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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게 완벽한 여자 아이에 관하여

    내게 완벽한 여자 아이에 관하여

    내게 완벽한 여자 아이를 상상해본다. 그 아이는 키가 자그마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어 찾아야 할 정도의 키. 얼굴은 동그레해서 어딘가 포근한 느낌을 준다. 너무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은 보통의 체형. 그런 평범함이 오히려 좋다. 화려한 이목구비보다는 뚜렷하지 않은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아도, 자꾸 보고 싶어지는 그런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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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의 바다에서

    겨울의 바다에서

    파도가 부서진다.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할퀴는데, 이상하게도 그 아픔이 오히려 위안이 된다. 회색빛 하늘과 더 짙은 회색의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은 오늘따라 더욱 흐릿하다. 세상의 끝은 이런 모습일까. 모래알은 차갑고, 젖은 발자국은 금세 지워진다. 인적 없는 이 바닷가에서 나만의, 아니 나와 바다, 그리고 바람만의 대화가 이어진다.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지점에서 무언가 작은 점이 보인다. 처음엔 갈매기인가 싶었다. 아니, 사람의 형체다. 여자다. 찬바람을 뚫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왜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 나처럼 무언가를 찾으러 왔을까,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걸까.

    점점 가까워진다. 검은색 긴 코트가 바람에 나부낀다. 바다를 보는 건지, 모래를 보는 건지, 아니면 그저 앞만 보고 걷는 건지…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리는데, 그녀는 손으로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무심한 걸까, 아니면 그 흩날림마저 즐기는 걸까. 긴 머리카락이 검은 실처럼 허공에서 춤을 춘다. 바다처럼 푸른 스카프가 코트 위에서 파도처럼 일렁인다. 어쩌면 그녀는 바다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오, 생각보다 젊다. 아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바다처럼 깊은 눈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나를 보지 않는다. 아니, 바다도, 하늘도,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자신의 내면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는데, 추위 때문일까, 아니면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넘쳐서일까.

    그녀의 뺨은 바람에 붉게 물들었다. 손은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넣은 채, 발걸음은 일정하다. 리듬이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음악에 맞춰 걷는 것 같다. 그 음악은 어떤 멜로디일까. 슬픈 발라드? 아니면 고요한 클래식? 어쩌면 바다의 소리와 같은,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의 리듬?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것 같다. 내 호흡이 그녀의 호흡과 겹치는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스친다. 낯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이 묘한 연결감은 무엇일까.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데, 어쩌면 가장 깊은 곳에서는 같은 이유로 이 겨울 바다를 찾은 건 아닐까.

    잠시, 아주 잠시 그녀의 시선이 나와 마주친다. 눈빛에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나도 모르게 같은 동작으로 답한다. 어떤 언어보다 깊은 대화가 오간다. ‘당신도 알고 있군요, 이 겨울 바다의 비밀을.’ 약속이나 한 듯 우리의 시선은 다시 바다로 향한다.

    그녀가 지나간다. 코트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내 옆을 스쳐간다. 희미한 향기가 잠시 머문다. 소금기와 뒤섞인 그 향은 무엇일까. 재스민? 아니면 바다 그 자체의 냄새? 그녀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이야기를 새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가 와서 그 흔적을 지울 테지만.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어깨는 펴져 있고, 걸음은 여전히 일정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집? 누군가를 만나러? 아니면 또 다른 고독한 해변을 찾아서? 바람은 더 거세지고, 파도는 더 높아진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림 없이 걷는다. 강인함인가, 체념인가, 아니면 그저 무심함인가.

    이제 그녀는 다시 작은 점이 되었다. 처음 내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처럼. 점점 더 작아져 결국에는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라진다. 마치 시간의 흐름 속에 녹아든 것처럼. 그녀가 왔던 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파도가 모든 것을 지웠다.

    이제 다시 나 혼자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녀의 존재가, 그 짧은 교감이, 이 겨울 바다에 무언가를 남긴 것 같다. 바다는 여전히 차갑고, 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변했다. 마치 오래된 얼음이 조금 녹은 것처럼.

    파도가 부서진다.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번. 끝없는 순환, 그 속에서 우리는 잠시 만났다가 헤어진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어쩌면 나의 또 다른 모습, 내가 되고 싶었던 혹은 두려워했던 나의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잠시 공유한 또 하나의 외로운 영혼일지도.

    해가 구름 사이로 잠시 얼굴을 내민다. 바다는 순간 빛나고, 그 빛 속에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겨울 바다에서 만난 그림자, 그 신비로운 만남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고, 나는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 어느 가을 오후의 카페에서

    어느 가을 오후의 카페에서

    창가에 앉아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오후, 커피 향기가 은은히 퍼지는 이 공간에서 나는 잠시 세상과 분리된 듯한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바깥의 햇살은 부드럽게 창문을 넘어와 테이블 위에 따스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계절, 시간은 마치 꿀처럼 느릿하게 흐르는 듯했다.

    그때였다. 유리창 너머로 한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리고 걸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이며 부드럽게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마치 물결치는 검은 비단 같았다.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어 은은한 갈색 빛을 띠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릴 때마다 그림자와 빛이 교차하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의 실루엣은 가을 햇살 아래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코트 자락이 걸음에 맞춰 살짝 흔들리며 리듬감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입은 코트는 약간 헐렁해 보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코트 자락이 나풀거리며 그녀의 날렵한 걸음걸이에 생동감을 더했다.

    그녀의 걸음은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듯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길가에 핀 작은 꽃을 내려다보는 모습에서 잠시나마 세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 순간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고, 나는 카페 창문 너머로 그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반쯤만 보였다. 옆모습이었기에 눈매의 깊이나 입술의 모양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햇살에 비친 그녀의 피부는 투명한 빛을 머금은 듯했다. 가끔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미소를 지을 때면, 그 표정이 마치 따스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미소는 어쩐지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만드는 전염성이 있었다.

    그녀의 한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방금 어딘가에서 소중한 것을 구매했을까? 혹은 누군가를 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 가방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해 보였다. 가방을 들고 있는 손목이 살짝 올라갈 때마다 시계가 햇살에 반짝였다.

    다른 한 손은 자유롭게 흔들리며 그녀의 걸음에 자연스러운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가끔 그 손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섬세함이 느껴졌다.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녀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으로 채우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짧은 순간 그녀의 존재는 내 오후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알 수 없는 타인들의 이야기가 우연히 내 시선에 들어와 잠시 감동을 주고 사라지는 것. 나의 이야기와 그녀의 이야기는 이 가을 오후, 이 카페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 교차했다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카페 창문 너머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인상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앞에 놓인 식어가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른한 오후는 계속되었고, 시간은 여전히 꿀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창밖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지나갈 때까지.

  • 7의 여자

    7의 여자

    가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오후,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릿하다. 그 속에서 그녀가 지나간다. 화려하지 않지만, 어딘가 눈길을 끄는 여자. 그녀는 10점 만점에 7점, 사람들 사이에서 ‘7의 여자’라 불리는 이다. 완벽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묘한 매력으로 세상을 사로잡는 그녀.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랑받는다. 왜일까?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외모의 숫자를 넘어,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진실을 품고 있다.
    7의 여자는 눈부신 미인과는 다르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완벽한 대칭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녀의 미소에는 살짝 비뚤어진 구석이 있고, 그녀의 눈빛은 때로 맑고 때로 그늘진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녀의 얼굴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풍경 같다. 그것은 화려한 일출이 아니라, 잔잔한 호수 위로 퍼지는 물안개 같은 아름다움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완벽함이 아닌, 친근함을 느낀다. 그녀는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은 말한다. “그녀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지 않아.” 10점의 여자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신화 속 여신 같지만, 7의 여자는 다르다. 그녀는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미소 짓고, 버스 정류장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한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묘한 생기가 있다. 그녀가 웃을 때,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진다. 그녀가 말할 때, 그 목소리는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그녀는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나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7의 여자는 자신을 안다. 그녀는 자신이 10점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5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감추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을 무기로 삼는다. 그녀의 자신감은 과시가 아니라, 조용한 확신이다. 그녀는 세상이 정한 완벽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의 옷차림은 최신 유행을 따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녀만의 색깔이 있다. 그녀의 말투는 세련되지 않을 수 있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다.
    그녀의 매력은 외모만이 아니다. 7의 여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빛난다. 그녀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진심으로 웃고,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줄 때 마음을 다한다. 그녀는 모든 이에게 다정하지 않지만, 그녀가 베푸는 다정함은 깊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데 탁월하다. 누군가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그녀의 조언은 거창하지 않지만,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너는 충분히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그녀 자신에게도 향한다.
    가끔 그녀는 외로움을 느낀다. 세상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 역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녀는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마음과 함께 걷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일 때도 충만하다. 그녀는 바람 부는 저녁, 창가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세상을 바라본다. 그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7점의 여자다.
    7의 여자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선다. 그녀는 10점의 완벽함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7점의 가치를 안다. 그 가치는 숫자로 매길 수 없는, 그녀만의 이야기와 감정, 그리고 삶의 흔적들로 만들어진다.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친구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삶의 용기를 주는 존재다. 그녀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지나친 거리의 한 사람일 수도, 당신이 사랑하는 이일 수도 있다.
    가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은 세상의 모든 7점을 담고 있다. 그녀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그녀는 7의 여자,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존재다.

  •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늘도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는데, 나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시계는 벌써 열한 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이 줄다리기를 한다. 그저 눈을 감고 세상을 잊고 싶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침대에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는다. 알림이 수십 개. 답장해야 할 메시지들, 확인해야 할 이메일들, 마감 기한이 다가오는 일들… 화면을 보다가 그대로 던져버린다. 오늘만큼은,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의욕이 넘쳤는데.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저녁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남아 나를 짓누른다.

    천장의 작은 균열을 바라본다. 저 균열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지난번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쩌면 나도 저렇게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금이 가 있는 건 아닐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살랑거리게 한다. 저 바람은 어디서 왔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한숨일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기분으로 오늘을 보내는 사람의 한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긴 숨결.

    유리잔에 남아있는 물을 바라본다. 반쯤 차 있어? 아니면 반쯤 비어 있어?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 마음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텅 비어 있는 걸까, 아니면 뭔가로 가득 차 있는 걸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사실은 너무 많은 것들을 동시에 느끼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읽다 만 책들이 쌓여있다. 며칠 전만 해도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지금은 손이 가지 않는다. 단어 하나를 읽는 것조차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창밖을 내다본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속도로 움직인다. 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처럼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을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지만, 속으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런 날들이 있다. 그냥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 열정도, 의욕도, 꿈도 잠시 접어두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고 싶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처럼 느껴지는 날.

    머릿속에서는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끊임없이 재생된다. 하지만 몸은 그 어떤 움직임도 거부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온다. 이 순간만큼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안이 된다.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린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나만 멈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이 멈춤도 필요한 시간일지 모른다. 무언가를 쉬었다 가기 위한,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 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도 결국엔 지나가겠지.

    손가락 끝으로 이불의 질감을 느낀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안전하다. 이 작은 공간, 이 순간이 나에게 주는 안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이제는 침대 끝자락에 닿아 있다.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흘려보낸 시간. 그래도 괜찮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 때가 있으니까.

    눈을 감는다.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함께, 오늘 하루를 그냥 보내기로 한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오늘이 있어야, 무언가를 하고 싶은 내일이 올 수 있을 테니까.

  • 비

    아침 6시 30분, 나는 언제나처럼 알람 소리가 울리기 5분 전에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내 안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음악이 만들어내는 푸른빛 공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트럼펫 소리가 내 의식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상하지,”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악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을까.”

    창밖으로 이제 정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아주 작은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잊혀진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나는 열다섯 살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비 오는 날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던 날. 그날의 비 냄새와 책 냄새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상하게도 첫사랑의 기억도 그날의 비와 함께 묶여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내게 남긴 흔적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인생도 이런 맛이 아닐까. 처음에는 쓰지만, 천천히 맛보면 그 안에 복잡하고 미묘한 풍미가 있다. 나는 또 다른 모금을 위해 컵을 들어올렸다.

    책상 위에는 어제 밤늦게까지 읽다 만 카프카의 ‘변신’이 놓여 있었다. 그레고르가 거대한 벌레로 변한 이야기. 때로는 나도 그런 기분이 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카프카와 달리, 나의 변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다.

    “변화란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같은 강이라고 부른다. 내가 열다섯 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같은 의식의 흐름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의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비 오는 날이면 항상 같은 말씀을 하셨다.

    “비는 하늘의 선물이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의 흐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들이 비처럼 내리고, 그것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결국 바다로 흘러간다.

    시계는 이제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잠시 더 비를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 고양이의 눈빛이 특별히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양이에게는 비가 그저 비일 뿐, 어떤 은유나 상징이 아닌 것이리라.

    “단순함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생각했다.

    커피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나는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상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어제의 내가 아니듯이, 오늘의 나도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의식의 흐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도시의 구름은 내면의 비를 부르고, 그 비는 다시 의식의 강을 채운다. 그리고 그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어디론가.

  • 낯설게 하기: 일상과 예술 속 새로운 시선

    낯설게 하기: 일상과 예술 속 새로운 시선

    매일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점점 투명해진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동작, 출근길에 마주치는 건물들, 손에 쥐는 스마트폰까지.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고’ 지나친다. 이런 상황에서 ‘낯설게 하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일상에 대한 자동화된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остранение)’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예술의 핵심 기능이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것.

    음악에서는 어떨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생각해보자.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앉아 한 음도 연주하지 않고 4분 33초 동안 침묵하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침묵’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콘서트홀의 기침 소리, 의자 삐걱거림, 에어컨 소리까지 모두 음악이 된다. 평소엔 무시되던 소리들이 갑자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건축에서는 프랭크 게리의 작품들이 일상적 공간 개념을 전복시킨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전통적인 직선과 수직 구조에서 벗어나 마치 금속 파도가 굳어버린 듯한 형태로 건축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흔든다. 일상적 건축물과의 단절을 통해 우리는 ‘건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진에서는 앙드레 케르테스가 일상의 사물을 기울이거나 왜곡된 각도에서 촬영함으로써 평범한 풍경을 초현실적으로 변형시켰다. 그의 ‘뒤틀린 포크’나 ‘멜랑콜리’와 같은 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수천 번 봤던 사물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미술에서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단순한 파이프 그림 아래 역설적인 문구를 배치함으로써 이미지와 실재, 재현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자동화된 인식을 흔든다. 그림 속 파이프는 정말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충격적인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낯설게 하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의 골목길이 어릴 때보다 좁게 느껴질 때, 혹은 매일 지나치던 거리의 한 구석에서 처음 보는 작은 꽃을 발견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세상을 새롭게 본다.

    어쩌면 예술의 핵심은 바로 이 ‘낯설게 하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자동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은 거창한 예술 작품뿐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전환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매일 같은 길로 출근하던 사람이 하루는 다른 길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세상은 다시 낯설고 생생해질 수 있다.

    낯설게 보기는 결국 깨어있는 삶의 방식이다. 자동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 예술은 그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안내자일 뿐이다.​​​​​​​​​​​​​​​​

  •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

    어린 시절, 어른들은 늘 말씀하셨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 말을 믿고 우리는 밤새워 공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약속은 희미해져만 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다리 걷어차기. 자신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후, 뒤따라오는 이들이 같은 방법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투영하고 있다.

    며칠 전, 한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길 건너편의 학원가를 보게 되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불이 환하게 켜진 학원의 창문들. 그 속에서 미래를 꿈꾸며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들은 분명 누군가의 말을 믿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노력이 미래를 바꾼다”라는.

    하지만 이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어떠한가?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이제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들어간다 해도 고용의 안정성은 보장받기 어렵다.

    더 뼈아픈 현실은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시대적 흐름이 아니라, 앞서 기회를 얻은 세대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부동산을 여러 채 소유한 이들은 집값 하락을 우려해 규제 완화를 외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다. 이미 안정된 직장에 자리 잡은 이들은 신규 채용보다 기존 직원의 복지 향상에 더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주, 오랜 친구를 만났다. 대기업에 다니는 그는 최근 회사의 채용 축소 방침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사가 어렵다고 하더라고. 근데 사실 우리 부서만 해도 일은 넘쳐나는데 인력은 늘리지 않아. 기존 직원들의 연봉을 올려주는 대신 신규 채용을 줄이는 거지.” 그의 말에서 나는 또 다른 사다리 걷어차기를 발견했다.

    세대 간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간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기회를 독점했다”고 반박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일 테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갈등이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한 노인분이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소리쳤다. 그 젊은이가 야간근무를 마치고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차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세대의 충돌이 그 좁은 공간에 응축되어 있었다.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의 기회를 가로막으면, 결국 그 사회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청년들의 좌절은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고령화 사회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작점은 명확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다. 각 세대가 서로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어떤 정책적 해결책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어제 저녁, TV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젊은 창업자와 은퇴한 베테랑 직장인이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젊은이의 창의성과 노인의 경험이 만나 시너지를 발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협력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메시지였다.

    사다리는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고 나누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튼튼하고 넓은 사다리를 함께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회적 연대가 아닐까? 한 사람이 혼자 올라간 높이보다, 모두가 함께 올라간 높이가 더 의미 있는 법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밤은 깊어간다. 학원가의 불빛은 여전히 밝고, 젊은이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불태운다. 그들의 꿈이 사다리 걷어차기로 인해 좌절되지 않기를, 그들이 올라간 후에는 더 튼튼한 사다리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 골든 아워

    골든 아워

    해가 지기 전, 도시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운전대를 꽉 쥐고 있던 나는 빨간색 신호에 맞춰 횡단보도 앞에 부드럽게 차를 세웠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한 소녀였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황금빛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얼추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하얀색 이어폰을 꽂은 채 리듬에 맞춰 살짝 몸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문득 나의 저 나잇대 시절이 떠올랐다. 나도 저렇게 음악에 빠져 세상을 잊곤 했었지. 그때는 미래가 무한히 넓게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모든 가능성이 내 앞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저 선택만 하면 됐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고, 소녀는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걸이에는 어떤 가벼움이 있었다. 아직 세상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가벼움.

    나는 그녀가 길을 다 건널 때까지 눈으로 쫒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치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황금빛 햇살 아래, 그녀의 실루엣이 점점 멀어져 갔다.

    액셀러레이터를 밟기 전, 문득 내가 매일 지나치는 이 길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나치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그 순간, 그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서로의 삶에 들어와 있다.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맴돌았다. 저 소녀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녀의 꿈은 무엇일까? 그녀의 이어폰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을까?

    도시의 황금빛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더 짙은 파란색으로 물들었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창문을 조금 내리고 저녁 공기를 들이마셨다. 살짝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갑자기 내 앞에 펼쳐진 도로가 무한히 길게 느껴졌다.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삶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달리다가, 때로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순간들에서 의미를 찾는 것.

    오늘의 골든 아워는 이제 곧 끝나겠지만, 내일 또 다른 골든 아워가 찾아올 것이다. 그때는 또 어떤 순간이 내 기억에 남을까? 어떤 얼굴이, 어떤 장면이 내 마음을 움직일까?

    차를 몰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 지었다. 때로는 가장 평범한 순간이 가장 특별한 기억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횡단보도를 건너던 소녀의 모습은 내 마음 한구석에 작은 빛으로 남을 것이다.​​​​​​​​​​​​​​​​

  •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

    새벽 3시, 모니터의 푸른빛만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다.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버그는 끝없이 나타난다. “조금만 더”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코딩이 어느새 밤을 삼켜버렸다. 프로그래머의 시간은 이렇게 증발한다.

    프로그래밍의 세계에서 시간은 기묘한 존재다. 한 줄의 코드를 작성하는 데 1분이 걸리지만, 그 코드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데는 몇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플로우 상태’에 빠지면 5분이 5시간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까다로운 버그를 해결하려 할 때는 5시간이 5분처럼 느껴진다.

    내 경력 초기, 나는 시간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정을 세우고, 포모도로 기법을 활용하고, 최신 시간 관리 앱을 설치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은 예측 불가능한 예술이다. 간단해 보이는 기능이 기술적 부채의 미로로 이어지고, ‘5분이면 끝날’ 작업이 하루 종일 잡아먹는다.

    시간은 프로그래머에게 가장 귀중한 자원이자 가장 큰 적이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는 코드를 작성하면서도, 그 코드를 작성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자동화에 몰두하여 “이 작업을 자동화하는 데 10시간이 걸리지만, 매일 30초를 절약할 수 있어!”라고 자부하며, 그 투자가 언제 회수될지는 계산하지 않는다.

    경험이 쌓이면서 깨달았다.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는 단순히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균형의 예술이다. 코드와 씨름하는 시간, 동료와 소통하는 시간,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재충전하는 시간 사이의 균형.

    가장 큰 깨달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중요성이었다. 화면을 응시하며 문제 해결에 막막해할 때, 잠시 자리를 떠나 산책을 하거나 차 한 잔을 마시는 것이 해결책을 찾는 지름길일 때가 많다. 뇌가 백그라운드에서 작업을 처리하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다.

    또한 ‘완벽’과 ‘충분히 좋음’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모든 코드를 최적화하고 모든 엣지 케이스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로는 ‘작동하는’ 코드를 제출하고, 다음 과제로 넘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프로그래머로서 시간 관리의 역설은, 코드를 작성하지 않는 시간이 더 나은 코드를 만든다는 것이다. 충분한 휴식, 규칙적인 운동, 취미 생활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생산성의 필수 요소다. 번아웃된 프로그래머는 좋은 코드를 쓸 수 없다.

    결국 프로그래머의 시간 관리는 기술적 도전만큼이나 개인적 여정이다. 자신의 리듬을 이해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지속 가능한 페이스를 찾는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코드와 삶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이제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내일의 나를 위해, 지금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침대로 향할 시간이다.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은 결국 자기 자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