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유리 속의 혁명

    유리 속의 혁명

    2004년,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는 고요했다. 스티브 잡스는 회의실에서 혼자 앉아 낡은 뉴턴 PDA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건 실패했지만, 아이디어는 틀리지 않았어,”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엔 새 꿈이 자라고 있었다. 전화기, 음악 플레이어, 인터넷—모두를 하나로 묶는 기계. 창밖엔 달빛이 비쳤고, 그는 결심했다. “이걸 만들 거야.”

    다음 날, 그는 팀을 소집했다. 토니 파델, 스콧 포스톨, 조나단 아이브—애플의 천재들이었다. “휴대폰을 재발명할 거야,” 스티브는 선언했다. 팀은 얼떨떨했다. “휴대폰? 우리가?” 토니가 물었다. 스티브는 단호했다. “블랙베리, 모토로라는 구닥다리야. 우리가 새 표준을 세울 거야.” 코드명은 퍼플(Purple).

    개발은 비밀 속에 시작됐다. 쿠퍼티노의 지하 실험실은 잠금장치로 봉쇄됐고, 팀은 밤낮없이 움직였다. 토니는 아이팟의 뿌리를 심었고, 조나단은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몸을 빚었다. “단추 하나만 놔,” 스티브는 말했다. “복잡한 건 싫어.” 하지만 문제는 터졌다. 화면은 작았고, 키보드는 불편했다. “이건 안 돼!” 스티브가 소리쳤다. 그는 책상을 쾅 치며 말했다. “전부 터치로 가자.”

    2005년, 터닝포인트가 왔다. 스콧은 멀티터치 기술을 제안했다. “손가락으로 확대하고, 스크롤하고—이게 미래야.” 조나단은 얇은 유리판을 들고 왔다. “이걸로 화면을 덮어.” 스티브는 손으로 유리를 만지며 미소 지었다. “이거야. 이 느낌이야.” 하지만 속도는 느렸다. OS X를 축소한 소프트웨어는 무거웠다. 팀은 지쳤다. “스티브, 시간 없어,” 스콧이 말했다. “그럼 더 빨리 해,” 스티브는 단칼에 잘랐다.

    2006년,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얇은 유리판에 아이콘이 떠 있었다. 스티브는 손가락으로 스와이프하며 말했다. “이건 마법이야.” 하지만 위기가 닥쳤다. 배터리는 몇 시간 만에 닳았고, 통화 품질은 엉망이었다. “출시가 코앞인데!” 토니가 절망했다. 스티브는 이를 악물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안 나가. 다시 해.”

    2007년 1월 9일, 샌프란시스코 모스콘 센터. 스티브는 검은 터틀넥을 입고 무대에 섰다. “오늘, 애플은 세 가지를 재발명합니다. 전화기, 음악 플레이어, 인터넷.” 그는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냈다. 화면이 켜지며 아이콘이 빛났다. “이걸 아이폰이라고 합니다.” 관객은 숨을 멈췄다. 손가락이 스크롤하고, 사진이 커졌다. 환호가 터졌다. 무대 뒤, 팀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6월, 아이폰이 세상에 나왔다. 사람들은 줄을 섰고, 세상은 바뀌었다. 스티브는 사무실에서 혼자 유리창을 봤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2004년의 그 꿈은, 유리 속에서 혁명으로 피어났다.

  • 얼음 속의 불꽃

    얼음 속의 불꽃

    1996년,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몇 달 전 NeXT에서 돌아와, 회의실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창밖엔 비가 내렸고, 그의 손엔 NeXTSTEP의 코드가 담긴 디스크가 들려 있었다. 애플은 무너지고 있었다. 맥 OS는 낡았고, 경쟁자들은 앞서갔다. “이건 끝이 아니야,” 스티브는 중얼거렸다. “내가 다시 시작할 거야.”

    그는 전화를 들었다. “어베이, 팀을 불러.” 어베이 티바니언, 조나단 루빈스타인—NeXT 시절의 동료들이었다. “애플을 살리려면 새 운영체제가 필요해. NeXTSTEP을 심어야 해.” 어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간 없어, 스티브. 1년 안에 돼야 해.” 스티브는 이를 악물었다. “그럼 밤을 새우자.”

    개발은 전쟁이었다. 쿠퍼티노의 지하 사무실에서, 팀은 NeXTSTEP을 뜯었다. 유닉스 기반의 단단한 뼈대, 매끄러운 인터페이스—그들은 이를 맥에 맞게 다듬었다. “사용자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해,” 스티브는 강조했다. 어느 날, 그는 화이트보드에 물방울 모양의 창을 그렸다. “이렇게 예뻐야 해.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야.” 팀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비전에 끌렸다.

    1997년, 애플은 NeXT를 인수했다. 스티브는 CEO 자리에 앉았고, 프로젝트는 속도를 냈다. 코드명은 랩소디(Rhapsody). 하지만 갈등이 터졌다. 개발자들은 “너무 복잡해!”라며 반발했고, 외부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기존 앱이 안 돌아가!”라고 불평했다. 스티브는 회의실에서 소리쳤다. “우리가 틀린 게 아니야. 세상이 따라올 거야!”

    1999년, 방향이 바뀌었다. “랩소디는 너무 무거워. 더 가볍고 빠르게.” 팀은 새 계획을 세웠다. 코드명 OS X. X는 로마 숫자 10, 혁신의 상징이었다. 어베이는 커널을 다듬었고, 조나단은 하드웨어와 맞췄다. 스티브는 디자인에 집착했다. “창이 반짝여야 해. 물처럼 투명해야 해!” 아쿠아(Aqua) 인터페이스가 태어났다.

    2000년, 첫 데모가 나왔다. 스티브는 무대에 서서 OS X를 켰다. 물방울 버튼, 반투명 창—관객은 숨을 멈췄다. “이건 미래야,” 그가 말했다. 하지만 속으론 불안했다. 출시는 늦어졌고, 버그가 쏟아졌다. 팀은 지쳤다. 어느 밤, 어베이가 말했다. “스티브, 우리가 너무 서둘렀나?” 스티브는 단호했다. “늦는 건 괜찮아. 완벽하지 않으면 안 돼.”

    2001년 3월 24일, OS X 10.0 ‘치타(Cheetah)’가 나왔다. 느렸지만 아름다웠다. 사용자들은 매혹됐다. “이게 맥이야?”라는 감탄이 터졌다. 스티브는 사무실에서 팀과 샴페인을 들었다. “우리가 해냈어.”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10.1, 10.2—OS X는 날렵해졌다. 2007년, 레오파드(Leopard)가 나올 땐 세상을 뒤흔들었다.

    2015년, 쿠퍼티노의 밤. 스티브는 떠났지만, OS X는 macOS로 이름을 바꿔 살아남았다. 어베이는 창밖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가 없어도 이 불꽃은 꺼지지 않아.” 1996년의 얼어붙은 순간, 스티브가 심은 씨앗은 이제 거대한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 녹색 꿈의 섬

    녹색 꿈의 섬

    1991년, 캘리포니아 멘로파크의 여름은 따뜻했다. 제임스 고슬링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사무실에서 낡은 워크스테이션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론 햇빛이 쏟아졌고, 그의 손엔 연필이 들려 있었다. “미래는 연결이야,”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TV, 냉장고, 자동차—모든 기기가 서로 말을 걸며 움직이는 세상. 그 꿈을 이루려면 새 언어가 필요했다.

    몇 달 전, 그는 ‘그린 프로젝트(Green Project)’라는 비밀스러운 팀에 합류했다. 패트릭 노튼, 마이크 셰리던과 함께였다. 썬의 높은 사람들은 말했다. “스마트 기기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봐.” 제임스는 C와 C++를 좋아했지만, 한계가 보였다. “너무 복잡하고, 오류가 많아.” 그는 새 언어를 구상했다. 단순하고, 안전하고, 어디서나 돌아가는 것.

    사무실은 곧 실험실이 됐다. 제임스는 Oak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밖 오크 나무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는 밤을 새우며 코드를 썼다. 객체지향, 가비지 컬렉션, 플랫폼 독립성—아이디어가 하나씩 쌓였다. “컴파일 한번 하면 어디서나 돼야 해,” 그는 팀에게 말했다. 1992년, 첫 데모가 나왔다. 작은 장치에서 화면이 깜빡이며 “Hello, World”가 떴다. “됐어!” 패트릭이 외쳤다. 하지만 썬은 관심이 없었다. “이게 뭐에 쓰이는데?”

    시간이 흘렀다. 그린 프로젝트는 표류했다. 제임스는 좌절했지만, 인터넷의 물결을 봤다. “웹이 커지고 있어. 이걸로 해볼까?” 그는 Oak를 다듬었다. 1995년, 썬은 방향을 틀었다. “웹 브라우저에서 돌아가게 하자.” 이름도 바꿨다. 자바(Java)—팀이 좋아하던 커피에서 따왔다. 제임스는 웃었다. “커피처럼 강렬하고 부드럽길.”

    5월, 썬월드 컨퍼런스에서 자바가 공개됐다. 존 게이지가 무대에 서서 말했다. “이건 인터넷의 미래야!” 브라우저에서 애플릿이 춤췄다. 관객은 환호했다. 제임스는 무대 뒤에서 손을 떨었다. “내 꿈이 세상에 나왔어.” 자바는 빠르게 퍼졌다. 개발자들은 단순함에 반했고, “Write Once, Run Anywhere”라는 약속에 끌렸다.

    하지만 갈등도 있었다. 썬은 자바를 오픈소스로 풀까 고민했지만, 통제를 유지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J++로 반격하며 소송이 오갔다. 제임스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만든 건 자유로워야 했는데.” 그래도 자바는 멈추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 안드로이드—세계 곳곳으로 뻗었다.

    2010년, 오라클이 썬을 인수했다. 제임스는 떠났다. “자바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2023년, 멘로파크의 카페에서 그는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열었다. 자바 21이 깔려 있었다. “여전히 잘 돌아가네,” 그는 미소 지었다.

    창밖 오크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다. 1991년의 그 씨앗은 이제 거대한 섬이 되어, 전 세계를 연결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녹색 꿈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 북풍 속의 씨앗

    북풍 속의 씨앗

    1994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가을은 차가웠다. 몬티 위데니우스는 아파트의 작은 방에서 낡은 PC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론 북풍이 몰아쳤고, 화면엔 코드 줄이 깜빡였다. 그의 옆엔 데이비드 액스마크가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몬티, 이게 정말 될까?” 데이비드가 물었다. 몬티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되게 만들 거야.”

    몇 년 전, 몬티는 TcX라는 회사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다뤘다. mSQL이라는 도구를 썼지만, 속도가 느리고 제약이 많았다. “내가 원하는 건 더 빠르고 단순한 거야,” 그는 생각했다. 어느 날 밤, 그는 키보드를 잡고 새 데이터베이스를 짜기 시작했다. 목표는 명확했다. 누구나 쉽게 쓰고, 속도가 빠른 시스템. 이름을 고민하다 딸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MySQL—첫째 딸 ‘My’의 이름을 딴 선물이었다.

    몬티는 코드를 썼다. ISAM 엔진으로 파일을 관리하고, 쿼리를 최적화했다. 데이비드는 사업 쪽을 맡았다. “이걸 무료로 주고, 지원으로 돈을 벌자.” 그들의 아이디어였다. 1995년, MySQL 3.11이 세상에 나왔다. 작고 날쌔서, 웹 개발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다. “이거 빠르네!” “설치도 쉬워!” 몬티는 미소 지었다.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

    1998년, TcX는 MySQL AB로 이름을 바꿨다. 몬티와 데이비드는 앨런 라슨을 끌어들여 팀을 키웠다. 오픈소스였지만, 듀얼 라이선스로 돈을 벌었다. 무료로 쓰고 싶으면 GPL, 상업용은 유료. 회사는 스톡홀름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자랐다. 어느 날, 몬티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이건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야. 사람들이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을 바꾸는 거야.”

    2000년대 초, MySQL은 폭발했다. 인터넷 붐과 함께 웹사이트들이 데이터를 쌓았고, MySQL은 그 중심에 섰다. 페이스북, 유튜브—거대 기업들이 채택했다. 하지만 몬티는 걱정했다. “너무 커지면 자유를 잃을지도.” 그의 예감은 맞았다. 2008년,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MySQL AB를 10억 달러에 샀다. 몬티는 기뻤지만, 불안도 커졌다.

    2009년, 오라클이 썬을 인수했다. 몬티의 손에서 MySQL이 떠났다. “내가 만든 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야,” 그는 북풍이 부는 창가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떠났고, 곧 마리아DB라는 새 씨앗을 심었다. 하지만 MySQL은 멈추지 않았다. 오라클 아래서도 진화하며, 전 세계 서버에서 뛰었다.

    2015년, 스톡홀름의 겨울. 몬티는 딸 My와 함께 눈 덮인 거리를 걸었다. “아빠가 만든 게 세상에 남았어?” My가 물었다. 몬티는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남았지. 그리고 계속 자랄 거야.” 1994년의 그 방에서 뿌린 씨앗은, 북풍을 넘어 세계를 뒤덮은 나무가 되었다.

    2009년, 핀란드 헬싱키의 겨울은 깊고 차가웠다. 몬티 위데니우스는 집 서재에서 낡은 데스크톱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엔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눈을 실어 나르고, 화면엔 그가 14년 전 만든 MySQL 코드가 깜빡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오라클이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하면서 MySQL은 거대한 손아귀에 들어갔다. “내 꿈이 이렇게 끝날 순 없어,” 몬티는 중얼거렸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결심했다. “다시 시작해야 해.” MySQL의 뿌리를 살려 새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름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마리아DB(MariaDB)—그의 막내딸 마리아의 이름을 딴 것. “MySQL이 내 첫째 딸을 위한 거였다면, 이건 마리아를 위한 거야,” 그는 미소 지었다. 자유와 개방의 정신을 지키는,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였다.

    몬티는 키보드를 잡았다. MySQL 5.1을 포크(fork)해 코드를 뜯어고쳤다. 속도를 높이고, 보안을 강화하고, 새로운 엔진을 추가했다. “오라클이 닫으려는 문을 내가 열어줄 거야.” 그는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아리아(Aria)라는 저장 엔진은 원래 ‘마리아’로 불렸지만, 혼란을 피하려 이름을 바꿨다. 그래도 프로젝트의 심장은 ‘마리아’로 뛰었다.

    며칠 뒤, 그는 메일링 리스트에 글을 올렸다. “MySQL의 대안, 마리아DB를 시작했어요. 같이 만들 사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 세계 개발자들이 모여들었다. 스웨덴의 해커가 버그를 고쳤고, 미국의 프로그래머가 성능을 개선했다. 몬티는 놀랐다. “이건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구나.”

    2010년, 오라클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MySQL 사용자들은 불안해했다. “오라클이 문을 잠갔다고? 그럼 우리 문을 열자.” 몬티는 마리아DB를 GPL 라이선스 아래 완전히 개방했다. 같은 해, 마리아DB 5.1이 나왔다.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기업들이 눈을 돌렸다. 위키피디아, 구글—거대 사용자들이 마리아DB를 품었다.

    2012년, 몬티는 더 큰 걸 꿈꿨다. “이건 커뮤니티의 것이어야 해.” 그는 마리아DB 재단을 설립했다. 데이비드 액스마크와 앨런 라슨 같은 옛 동료들이 힘을 보탰다. “오라클 같은 거대 기업에 다시 넘어가지 않게 지킬 거야.” 재단은 투명성을 약속했고, 개발은 공개적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2014년, 마리아DB 10.0이 나왔다. 오라클의 MySQL을 뛰어넘는 기능—컬럼스토어, JSON 지원—이 빛났다. 몬티는 헬싱키의 밤하늘을 보며 맥주를 들었다. “이건 단순한 코드가 아니야. 자유의 증거야.” 커뮤니티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2023년, 오라클의 그늘을 피해 K1 투자 그룹이 마리아DB를 인수했지만, 재단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겨울밤, 몬티는 딸 마리아와 창밖을 봤다. 북해 위 별빛이 반짝였다. “아빠가 만든 게 세상을 바꿨다고?” 마리아가 물었다. 몬티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세상이 같이 만든 거야.” 그 별빛 아래, 마리아DB는 자유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 혼돈 속의 가지

    혼돈 속의 가지

    2005년, 핀란드 헬싱키의 봄은 아직 쌀쌀했다. 리누스 토르발스는 집 거실에서 낡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엔 리눅스 커널 코드가 깜빡였고, 그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몇 주 전, 비트키퍼(BitKeeper)라는 버전 관리 시스템이 무너졌다. 리눅스 커뮤니티는 그 도구에 의존했지만, 라이선스 문제로 개발자들이 등을 돌렸다. “이건 터무니없어,” 리누스는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어.”

    그는 커피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빠르고, 분산되고, 단순해야 해.” 리눅스를 만들 때처럼, 그는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법을 알았다. 키보드가 춤을 췄다. 파일의 변화를 추적하고, 브랜치를 나누고, 합치는 시스템. 며칠 밤을 새운 끝에, 그는 첫 번째 코드를 완성했다. 이름은 고민하지 않았다. 깃(Git)—영국 속어로 ‘멍청이’라는 뜻. “이건 나 자신을 위한 거야,” 그는 농담처럼 말했다.

    리누스는 리눅스 메일링 리스트에 글을 올렸다. “새로운 버전 관리 도구를 만들었어요. 써보세요.”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이게 뭐야?” “너무 복잡해!” 하지만 몇몇은 호기심을 가졌다. 주니치 우에카와 같은 해커가 코드를 뜯어보며 말했다. “이건… 강력하네.” 깃은 중앙 서버 없이 누구나 코드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분산된 자유의 맛이었다.

    며칠 뒤, 리누스는 깃으로 리눅스 커널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브랜치가 나뉘고, 커밋이 쌓였다. “혼돈이 아니라 가지야,” 그는 깨달았다. 커뮤니티는 점점 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불만도 있었다. “명령어가 너무 어려워!” “UI가 없잖아!” 리누스는 코웃음을 쳤다. “깃은 도구야, 장난감이 아니야. 배워서 써.”

    2005년 여름, 깃은 오픈소스로 공개됐다. 소스 코드는 인터넷을 타고 퍼졌다. 토르스텐 글라저가 독일에서 기능을 추가했고, 미국의 개발자가 버그를 고쳤다. 리누스는 놀랐다. “내가 다 할 필요가 없네.” 깃은 그의 손을 떠나 커뮤니티의 것이 됐다.

    2008년, 깃허브(GitHub)가 나타났다. 트래비스와 크리스가 만든 이 플랫폼은 깃을 더 쉽게 썼다. 리누스는 흥미롭게 지켜봤다. “내가 만든 괴물이 이렇게 예뻐질 줄이야.” 깃허브는 깃을 전 세계로 퍼뜨렸다. 스타트업, 대기업, 학생—모두가 깃으로 코드를 공유했다.

    2015년, 헬싱키의 가을. 리누스는 가족과 저녁을 먹다 문득 창밖을 봤다. 나무 가지처럼 뻗은 거리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깃은 이제 수백만 프로젝트의 뿌리였다. “내가 혼자 시작했지만, 혼자 끝낸 게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어느 날, 한 개발자가 메일로 물었다. “깃을 왜 만들었어요?” 리누스는 짧게 답했다. “짜증났으니까.”

    밤이 깊었다. 노트북 화면엔 깃 로그가 떠 있었다. 커밋 하나하나가 가지처럼 얽혀 있었다. 2005년의 그 짜증은, 세상을 바꾼 혼돈 속의 질서가 되었다.

  •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오늘도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지는데, 나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다. 시계는 벌써 열한 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마음이 줄다리기를 한다. 그저 눈을 감고 세상을 잊고 싶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다.

    침대에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집는다. 알림이 수십 개. 답장해야 할 메시지들, 확인해야 할 이메일들, 마감 기한이 다가오는 일들… 화면을 보다가 그대로 던져버린다. 오늘만큼은,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의욕이 넘쳤는데. 아침에 일어나 운동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저녁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만 남아 나를 짓누른다.

    천장의 작은 균열을 바라본다. 저 균열은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지난번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쩌면 나도 저렇게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금이 가 있는 건 아닐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커튼을 살랑거리게 한다. 저 바람은 어디서 왔을까? 어쩌면 누군가의 한숨일지도 모른다. 나와 같은 기분으로 오늘을 보내는 사람의 한숨.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긴 숨결.

    유리잔에 남아있는 물을 바라본다. 반쯤 차 있어? 아니면 반쯤 비어 있어?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 마음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텅 비어 있는 걸까, 아니면 뭔가로 가득 차 있는 걸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사실은 너무 많은 것들을 동시에 느끼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침대 옆 테이블 위에는 읽다 만 책들이 쌓여있다. 며칠 전만 해도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지금은 손이 가지 않는다. 단어 하나를 읽는 것조차 거대한 산을 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창밖을 내다본다. 사람들은 분주하게 오가고 있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속도로 움직인다. 저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처럼 무기력함에 빠져있는 사람은 없을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걷고 있지만, 속으로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이런 날들이 있다. 그냥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 열정도, 의욕도, 꿈도 잠시 접어두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고 싶은 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택처럼 느껴지는 날.

    머릿속에서는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끊임없이 재생된다. 하지만 몸은 그 어떤 움직임도 거부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밀려온다. 이 순간만큼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위안이 된다.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린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간다. 나만 멈춰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이 멈춤도 필요한 시간일지 모른다. 무언가를 쉬었다 가기 위한, 다시 시작하기 위한 준비 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도 결국엔 지나가겠지.

    손가락 끝으로 이불의 질감을 느낀다. 부드럽다. 따뜻하다. 안전하다. 이 작은 공간, 이 순간이 나에게 주는 안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이제는 침대 끝자락에 닿아 있다.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흘려보낸 시간. 그래도 괜찮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일 때가 있으니까.

    눈을 감는다.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함께, 오늘 하루를 그냥 보내기로 한다.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오늘이 있어야, 무언가를 하고 싶은 내일이 올 수 있을 테니까.

  • 이상형의 좀비를 만난 이야기

    이상형의 좀비를 만난 이야기

    어느 날, 세상은 끝났다. 아니, 적어도 내가 알던 세상은 끝났다. 좀비 아포칼립스가 시작된 지 석 달째, 거리는 폐허가 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아 필사적으로 헤맸다. 나 역시 낡은 배낭 하나에 의지하며 도시 외곽의 버려진 창고를 전전하고 있었다. 생존은 단순한 목표였다: 먹을 것을 찾고, 물을 구하고, 좀비를 피하라. 하지만 그날, 나는 예상치 못한 존재를 만났다. 이상형의 좀비를.
    그날 아침, 나는 창고 근처의 슈퍼마켓 폐허로 향했다. 통조림 몇 캔을 찾을 요량이었다. 거리는 고요했고, 바람에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병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슈퍼마켓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냄새—썩은 고기와 먼지 섞인 공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조심스럽게 통로를 지나며 바닥에 흩어진 물건들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좀비였다.
    나는 즉시 몸을 숙이고 선반 뒤에 숨었다.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신음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궁금한 듯한, 하이톤이 많이 섞인 소리였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나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통로 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좀비였다. 분명히 좀비였다. 창백한 피부, 흐릿한 눈동자, 그리고 어설프게 찢어진 옷은 좀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의 머리에는 초록색 리본이 묶여 있었고, 한쪽 손에는 낡은 곰 인형을 꼭 쥐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걷다가 선반에 걸려 넘어졌고, 그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곰 인형을 내려다보며 작게 “으으…” 하고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웠던지, 나는 순간 내가 좀비 아포칼립스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는 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곰 인형을 들어 올리더니 마치 대화를 나누듯 중얼거렸다. “으… 곰이… 배고프?”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어딘가 순수함이 묻어났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대체 뭐지? 좀비가 귀여울 수 있나?
    용기를 내어 선반 뒤에서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흐릿한 눈이 나와 마주쳤지만, 공격적인 기색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안녕?” 내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곰 인형을 내게 내밀었다. “으… 친구?”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녀는 다른 좀비들과 달랐다. 그녀는 여전히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살아 있을 때의 감정을, 혹은 누군가와의 연결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다. “그래, 친구.” 나는 그녀의 곰 인형을 받아들며 말했다.
    그날, 나는 그녀와 몇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곰 인형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려 했다. 나는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어떤 사람이었을지 상상했다. 아마도 밝고, 따뜻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초록색 리본과 곰 인형은 그녀가 잃고 싶지 않은 과거의 조각 같았다.
    해가 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떠나야 했다. 생존은 여전히 내 첫 번째 목표였고,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통조림 하나를 건넸다. “이거… 곰이 먹어.” 그녀는 통조림을 받아들고 다시 “으으…” 하며 미소를 짓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창고로 돌아왔다. 마음 한구석이 무겁고, 동시에 따뜻했다.
    그 후로 나는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만남은 내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한 세상에서도, 그녀는 내게 생존 이상의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 어쩌면, 우리가 정말로 지켜야 하는 것은 그런 작은 순간들, 그리고 그 안의 인간다움인지도 모른다.

  • 비

    아침 6시 30분, 나는 언제나처럼 알람 소리가 울리기 5분 전에 눈을 떴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내 안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 음악이 만들어내는 푸른빛 공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트럼펫 소리가 내 의식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상하지,”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악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을까.”

    창밖으로 이제 정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아주 작은 손가락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잊혀진 기억들이 다시 돌아오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나는 열다섯 살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비 오는 날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던 날. 그날의 비 냄새와 책 냄새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상하게도 첫사랑의 기억도 그날의 비와 함께 묶여있다. 그녀의 이름은…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이 내게 남긴 흔적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인생도 이런 맛이 아닐까. 처음에는 쓰지만, 천천히 맛보면 그 안에 복잡하고 미묘한 풍미가 있다. 나는 또 다른 모금을 위해 컵을 들어올렸다.

    책상 위에는 어제 밤늦게까지 읽다 만 카프카의 ‘변신’이 놓여 있었다. 그레고르가 거대한 벌레로 변한 이야기. 때로는 나도 그런 기분이 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카프카와 달리, 나의 변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용한 변화다.

    “변화란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같은 강이라고 부른다. 내가 열다섯 살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같은 의식의 흐름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의 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비 오는 날이면 항상 같은 말씀을 하셨다.

    “비는 하늘의 선물이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의 흐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들이 비처럼 내리고, 그것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결국 바다로 흘러간다.

    시계는 이제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잠시 더 비를 바라보았다. 길 건너편에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그 고양이의 눈빛이 특별히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고양이에게는 비가 그저 비일 뿐, 어떤 은유나 상징이 아닌 것이리라.

    “단순함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생각했다.

    커피잔을 싱크대에 내려놓으며, 나는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상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어제의 내가 아니듯이, 오늘의 나도 내일이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것이 의식의 흐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도시의 구름은 내면의 비를 부르고, 그 비는 다시 의식의 강을 채운다. 그리고 그 강은 끊임없이 흐른다, 어디론가.

  • 낯설게 하기: 일상과 예술 속 새로운 시선

    낯설게 하기: 일상과 예술 속 새로운 시선

    매일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점점 투명해진다.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하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동작, 출근길에 마주치는 건물들, 손에 쥐는 스마트폰까지. 모든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우리는 그것을 ‘보지 않고’ 지나친다. 이런 상황에서 ‘낯설게 하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일상에 대한 자동화된 인식을 타파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остранение)’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예술의 핵심 기능이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것.

    음악에서는 어떨까?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생각해보자.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앉아 한 음도 연주하지 않고 4분 33초 동안 침묵하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침묵’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콘서트홀의 기침 소리, 의자 삐걱거림, 에어컨 소리까지 모두 음악이 된다. 평소엔 무시되던 소리들이 갑자기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건축에서는 프랭크 게리의 작품들이 일상적 공간 개념을 전복시킨다.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은 전통적인 직선과 수직 구조에서 벗어나 마치 금속 파도가 굳어버린 듯한 형태로 건축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흔든다. 일상적 건축물과의 단절을 통해 우리는 ‘건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진에서는 앙드레 케르테스가 일상의 사물을 기울이거나 왜곡된 각도에서 촬영함으로써 평범한 풍경을 초현실적으로 변형시켰다. 그의 ‘뒤틀린 포크’나 ‘멜랑콜리’와 같은 작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수천 번 봤던 사물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든다.

    미술에서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단순한 파이프 그림 아래 역설적인 문구를 배치함으로써 이미지와 실재, 재현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자동화된 인식을 흔든다. 그림 속 파이프는 정말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갑자기 충격적인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종종 ‘낯설게 하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의 골목길이 어릴 때보다 좁게 느껴질 때, 혹은 매일 지나치던 거리의 한 구석에서 처음 보는 작은 꽃을 발견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잠시 멈춰 서서 세상을 새롭게 본다.

    어쩌면 예술의 핵심은 바로 이 ‘낯설게 하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자동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을 ‘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것은 거창한 예술 작품뿐 아니라 일상 속 작은 전환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매일 같은 길로 출근하던 사람이 하루는 다른 길을 택하는 것만으로도, 익숙한 세상은 다시 낯설고 생생해질 수 있다.

    낯설게 보기는 결국 깨어있는 삶의 방식이다. 자동화된 인식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 예술은 그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안내자일 뿐이다.​​​​​​​​​​​​​​​​

  •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

    어린 시절, 어른들은 늘 말씀하셨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그 말을 믿고 우리는 밤새워 공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약속은 희미해져만 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다리 걷어차기. 자신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후, 뒤따라오는 이들이 같은 방법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투영하고 있다.

    며칠 전, 한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길 건너편의 학원가를 보게 되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 불이 환하게 켜진 학원의 창문들. 그 속에서 미래를 꿈꾸며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들은 분명 누군가의 말을 믿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노력이 미래를 바꾼다”라는.

    하지만 이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현실은 어떠한가?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은 이제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신기루가 되어버렸다. 정규직 일자리는 줄어들고, 평생직장의 개념은 사라졌다. 취업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들어간다 해도 고용의 안정성은 보장받기 어렵다.

    더 뼈아픈 현실은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시대적 흐름이 아니라, 앞서 기회를 얻은 세대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의 결과라는 점이다. 부동산을 여러 채 소유한 이들은 집값 하락을 우려해 규제 완화를 외치고,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다. 이미 안정된 직장에 자리 잡은 이들은 신규 채용보다 기존 직원의 복지 향상에 더 목소리를 높인다.

    지난주, 오랜 친구를 만났다. 대기업에 다니는 그는 최근 회사의 채용 축소 방침에 대해 이야기했다. “회사가 어렵다고 하더라고. 근데 사실 우리 부서만 해도 일은 넘쳐나는데 인력은 늘리지 않아. 기존 직원들의 연봉을 올려주는 대신 신규 채용을 줄이는 거지.” 그의 말에서 나는 또 다른 사다리 걷어차기를 발견했다.

    세대 간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간다. 기성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기회를 독점했다”고 반박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일 테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갈등이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한 노인분이 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이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소리쳤다. 그 젊은이가 야간근무를 마치고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차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세대의 충돌이 그 좁은 공간에 응축되어 있었다.

    사다리를 걷어차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없다.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의 기회를 가로막으면, 결국 그 사회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고 장기적으로는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청년들의 좌절은 저출산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고령화 사회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작점은 명확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다. 각 세대가 서로의 입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는 어떤 정책적 해결책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어제 저녁, TV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젊은 창업자와 은퇴한 베테랑 직장인이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젊은이의 창의성과 노인의 경험이 만나 시너지를 발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 협력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메시지였다.

    사다리는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고 나누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튼튼하고 넓은 사다리를 함께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회적 연대가 아닐까? 한 사람이 혼자 올라간 높이보다, 모두가 함께 올라간 높이가 더 의미 있는 법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밤은 깊어간다. 학원가의 불빛은 여전히 밝고, 젊은이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불태운다. 그들의 꿈이 사다리 걷어차기로 인해 좌절되지 않기를, 그들이 올라간 후에는 더 튼튼한 사다리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건네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