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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멍청함에 대한 5가지 법칙

    멍청함에 대한 5가지 법칙

    이탈리아 경제학자 카를로 치폴라(Carlo M. Cipolla)는 그의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에세이 The Basic Laws of Human Stupidity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독특한 통찰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멍청함”을 단순한 실수가 아닌, 특정 행동 패턴으로 정의하고, 이를 5가지 법칙으로 정리했습니다.

    제1법칙: 우리는 항상 멍청한 사람의 수를 과소평가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멍청한 개인의 수를 과소평가한다.”

    첫 번째 법칙은 멍청함의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주변에 멍청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수가 놀라울 정도로 많습니다. 치폴라는 멍청함이 교육, 지위,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회 계층에 걸쳐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고학력자나 권위 있는 인물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법칙은 우리가 멍청함을 간과하거나 “그럴 리 없다”고 방심할 때 문제를 키운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제2법칙: 멍청함은 독립적인 특성이다

    “어떤 사람이 멍청한지는 그 사람의 다른 특성과 무관하다.”

    멍청함은 지능, 성격, 직업과 독립적인 특성입니다. 치폴라는 멍청함을 IQ나 학력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노벨상 수상자도 특정 상황에서 멍청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법칙은 멍청함이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누구나 잠재적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을 평가할 때 겉모습이나 명성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제3법칙: 멍청한 사람은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

    “멍청한 사람은 자신에게 이익이 없거나 손해를 끼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다.”

    이 법칙은 멍청함의 핵심 정의입니다. 치폴라는 사람을 행동의 결과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 지혜로운 사람: 자신과 타인에게 이익을 준다.
    • 악당: 자신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
    • 바보: 타인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
    • 멍청한 사람: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해를 끼친다.

    예를 들어, 회의에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제안을 고집하며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사람은 멍청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멍청함이 단순한 실수를 넘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4법칙: 멍청하지 않은 사람은 멍청한 사람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한다

    “멍청하지 않은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의 해로운 잠재력을 항상 과소평가한다.”

    멍청한 사람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하고 비논리적이어서, 지혜로운 사람조차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팀 프로젝트에서 한 명의 멍청한 행동이 전체 성과를 망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미리 막지 못합니다. 치폴라는 특히 멍청한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때 그 파괴력이 극대화된다고 경고합니다. 이 법칙은 멍청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제5법칙: 멍청한 사람은 가장 위험한 존재다

    “멍청한 사람은 모든 사람 중 가장 위험하다.”

    마지막 법칙은 멍청함의 위험성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악당은 이기적인 목적이 있기에 예측 가능하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무런 이익 없이 해를 끼치므로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치폴라는 멍청한 사람이 사회에 미치는 피해가 악당보다 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악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을 조절할 수 있지만, 멍청한 사람은 무모하게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이 법칙은 멍청함을 경시하지 말고, 이를 관리하거나 피할 전략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멍청함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치폴라의 법칙은 멍청함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일부임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인식: 멍청한 행동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음을 받아들이세요.
    경계: 특히 중요한 결정이나 프로젝트에서 멍청함의 영향을 최소화할 시스템을 만드세요.
    관용과 유머: 모든 사람이 때때로 어리석을 수 있으니, 이를 비판하기보다는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카를로 치폴라의 멍청함에 대한 5가지 법칙은 인간 행동의 어두운 면을 유쾌하게 조명합니다. 이 법칙들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통찰입니다. 멍청함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된 가능성이지만, 이를 인식하고 관리한다면 그 피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어리석은 상황에 마주쳤을 때, 치폴라의 법칙을 떠올리며 미소 지어보세요. 어쩌면 그게 가장 지혜로운 대응일지도 모릅니다.

  • 의식의 흐름

    의식의 흐름

    시계는 02:37을 가리키고 있다. 모니터의 푸른빛만이 어두운 방을 밝힌다. 커서가 깜빡이는 검은 화면 앞에서 나는 오늘도 코드와 씨름 중이다. 디버깅을 시작한 지 벌써 세 시간째. 버그는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if (response.status === 200) {

    그런데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달빛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곧 보름달이 되겠군. 이런 밤에 어머니는 만두를 만드셨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반죽을 동그랗게 빚던 손길, 그 옆에서 서툴게 따라하던 나의 모습.

    console.log("Debug point 1:", data);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로그를 확인해 보자. 아, 여기서 데이터 구조가 예상과 다르게 나오는군. JSON 포맷이 잘못됐나? API 문서를 다시 확인해야겠다. 그런데 API 문서라… 대학 시절에 교수놈이 항상 강조하셨지. “문서화는 코드만큼 중요하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for (let i = 0; i < array.length; i++) {

    반복문을 작성하는데, 문득 인생의 반복성에 대해 생각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 출근하고, 코드를 작성하고, 퇴근하는 일상.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찾고 있는 걸까? 가끔은 이 모든 것이 무한 루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종료 조건은 어디에 있는 걸까.

    try {

    예외 처리 구문을 작성하며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해 생각한다. 코드도, 인생도 항상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버그와 예외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function recursive() {

    함수… 재귀 함수… 자신을 다시 호출하는 함수. 마치 내 의식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의식은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질문한다. 이것이 인간의 독특한 특성이 아닐까? 내가 프로그래밍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코드를 통해 나의 생각을 구체화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의식의 흐름과 닮아있다.

    return new Promise((resolve, reject) => {

    프라미스. 코드에서의 비동기 처리. 지금은 완료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결과를 돌려주겠다는 약속. 인생의 많은 일들도 그렇다. 당장의 결과를 볼 수 없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 결실을 맺을 것이다.

    // TODO:

    항상 미뤄두는 코드 정리. 내일의 나에게 맡기는 오늘의 문제들. 인생에서도 그렇게 중요한 일들을 자꾸 미루고 있진 않은지.

    화면을 바라보다 문득 내 모습이 모니터에 희미하게 비친다. 나는 코드를 작성하고 있지만, 사실 코드가 나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의식의 흐름은 마치 프로그램의 실행 흐름과도 같다. 순차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기도 한다.

    git commit -m "Fix the bug that kept me up all night"

    드디어 버그를 찾았다. 지금은 새벽 4시 30분. 커밋 메시지를 작성하고 푸시한다. 오늘의 의식의 흐름은 여기서 끝이 난다. 내일은 또 다른 코드, 또 다른 생각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End of today's journey

  • 프로그래밍은 곧 추상화이다

    프로그래밍은 곧 추상화이다

    프로그래밍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기계에게 명령을 내리는 기술일까? 더 깊이 들여다보면, 프로그래밍은 현실 세계의 복잡함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과정이다. 이때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추상화(abstraction)이다. 프로그래밍이란 결국, 본질을 남기고 불필요한 세부사항을 걷어내는 추상화의 기술이다.

    추상화는 인간의 사고방식과도 밀접하다. 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자동차’라는 단어 하나로 우리는 수천 가지 종류의 자동차를 통칭한다. 각각의 모델, 색상, 제조사, 성능 차이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필요할 때만 꺼내 쓴다. 마찬가지로, 프로그래머는 프로그램을 만들 때 필요한 정보만을 골라내어 코드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 User라는 클래스를 만든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안에 이름, 이메일, 비밀번호 같은 속성만 정의하고, 사용자의 키나 혈액형은 생략한다. 왜냐하면, 그 정보는 현재 구현하려는 기능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은 추상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객체는 현실의 개체를 코드로 모델링한 것이다. ‘자동차’ 클래스를 만든다면, 그 클래스는 실제 자동차의 모든 특성을 담지 않는다. 주행, 정지, 연료 상태 같은 기능만 담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정보가 본질적인가’를 판단하고, 그 외의 세부 사항은 감춘다. 이처럼 추상화는 복잡함을 다루는 인간의 지혜이자, 프로그래밍의 근간이다.

    또한, 추상화는 계층을 만든다. 하드웨어의 물리적 동작을 다루는 기계어 위에 어셈블리어가 있고, 그 위에 고급 언어가 있으며, 더 위에는 프레임워크나 API가 있다. 우리는 C언어나 자바를 사용할 때, 트랜지스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라도 된다. 추상화 덕분에 개발자는 필요한 수준의 정보만 알고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즉, 추상화는 개발자의 인지적 부담을 줄여 주고, 생산성을 높여주는 필수 도구다.

    추상화는 또한 팀 협업에서도 중요하다. 인터페이스, 모듈, API 설계는 모두 추상화의 산물이다. 다른 팀원이 만든 기능을 사용할 때, 우리는 내부 구현을 몰라도 된다. 명확하게 정의된 입출력만 이해하면 된다. 이런 구조는 시스템의 유연성과 확장성을 높이며, 유지보수를 용이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추상화가 완벽한 해결책만은 아니다. 과도한 추상화는 오히려 복잡함을 낳을 수 있다.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껍데기만 만든다면, 프로그램은 애매하고 불완전해진다. 추상화는 정보의 선택과 제거를 수반하기에, 언제 어떤 수준의 추상화를 할 것인지는 깊은 통찰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프로그래밍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고의 예술’이라 불리는 이유다.

    결국 프로그래밍은 현실을 모델링하는 일이며, 그 핵심은 추상화에 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통해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감출지를 결정한다. 이는 마치 작가가 단어를 선택하고, 화가가 색을 고르는 과정과 닮아 있다. 프로그래밍은 곧 추상화다. 추상화를 잘하는 사람이 결국 좋은 프로그래머가 된다. 그리고 이 진리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코드를 더 깊이 있는 언어로 바라보게 된다.

  • 창고 속의 꿈 : 매킨토시(Macintosh) 이야기

    창고 속의 꿈 : 매킨토시(Macintosh) 이야기

    1981년,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애플의 본사 한구석에 자리 잡은 창고는 먼지와 땀 냄새로 가득했다. 형광등 아래, 스티브 잡스는 낡은 책상에 앉아 스케치북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의 앞엔 제프 래스킨이 가져온 이상한 기계가 놓여 있었다. 작고 네모난 상자, 단출한 화면, 그리고 키보드 하나. “이게 미래야, 스티브.” 제프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확신이 묻어났지만, 스티브의 눈빛은 회의적이었다.

    “이건 너무 느려. 그리고 별로 안 예뻐.” 스티브가 툭 내뱉었다. 제프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기술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거야. 급할 필요 없어.” 하지만 스티브는 급했다. 그는 제록스 PARC에서 본 것을 잊을 수 없었다. 마우스, 아이콘, 창—컴퓨터가 사람처럼 말하는 듯한 그 인터페이스. “우린 저걸 뛰어넘어야 해,” 스티브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며칠 뒤, 스티브는 창고로 팀을 끌고 왔다. 버렐 스미스, 앤디 허츠펠드, 빌 앳킨슨—각기 다른 괴짜들이었다. “우린 세상을 바꿀 컴퓨터를 만들 거야. 이름은 매킨토시.” 스티브의 선언에 팀은 반신반의했지만, 그의 열정은 전염성이 있었다. 제프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이었지만, 스티브가 들어오면서 모든 게 뒤바뀌었다. 제프는 점점 밀려났고, 스티브는 매킨토시를 자신의 비전으로 물들였다.

    창고는 곧 전쟁터가 되었다. 버렐은 밤을 새우며 회로를 설계했고, 앤디는 코드를 짜다 키보드에 엎어져 잠들었다. 빌은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다듬으며 “이건 예술이야!”라고 외쳤다. 스티브는 그들 사이를 오가며 채찍과 당근을 휘둘렀다. “이건 엉망이야!”라며 소리를 지른 뒤, 다음 순간엔 “너희는 천재야”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팀은 지쳤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1983년 여름, 첫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었다. 스티브는 화면에 떠오른 “Hello”라는 단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창이 열리고, 아이콘이 움직였다. 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속도는 느렸고, 메모리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걸로 게임 하나 제대로 못 돌리겠네,” 앤디가 투덜거렸다. 스티브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최적화해. 무조건 빨라져야 해.”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애플 내부에선 매킨토시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너무 비싸. 누가 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스티브는 더 독해졌다. 그는 팀을 몰아붙이며 “이건 그냥 기계가 아니야. 사람들의 삶을 바꿀 거라고!”라고 외쳤다. 어느 날 밤, 버렐이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스티브, 우리가 이걸 왜 하는 거지?” 스티브는 잠시 멈추더니 말했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고.”

    1984년 1월 24일, 샌프란시스코 플린트 센터. 스티브는 검은 터틀넥을 입고 무대에 섰다. 수천 명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는 가방에서 매킨토시를 꺼내 스위치를 켰다. 화면이 밝아지며 합성음이 흘렀다. “Hello, I’m Macintosh. Nice to meet you.” 관객은 숨을 멈췄고, 곧 환호가 터졌다. 창고에서 보낸 수백 개의 밤이 그 순간 빛을 발했다.

    무대 뒤, 팀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제프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씁쓸히 웃었다. 그의 꿈은 스티브의 손에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어쨌든 세상에 나왔다. 매킨토시는 단순한 컴퓨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능성의 상징이었다.

    그날 밤, 창고는 텅 비었다. 형광등 아래 남은 건 땀과 열정의 흔적뿐이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매킨토시의 부드러운 부팅 소리가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 비의 밤, 코드의 시작 : MS-DOS 이야기

    비의 밤, 코드의 시작 : MS-DOS 이야기

    1980년, 시애틀의 밤은 비로 젖어 있었다. 팀 패터슨은 작은 아파트의 책상에 앉아 PDP-11 미니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엔 녹색 글자들이 깜빡였고, 방 안엔 커피 냄새와 전자기기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는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SCP)라는 작은 회사에서 일하며, 취미 삼아 운영체제를 만들고 있었다. 이름은 QDOS. ‘Quick and Dirty Operating System’—빠르고 지저분한 운영체제. 이름처럼 단순했지만, 그의 손끝에서 점점 생명을 얻고 있었다.

    “이걸로 86-DOS라고 부르면 어떨까?” 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인텔 8086 프로세서를 겨냥한 이 시스템은 복잡한 메인프레임이 아니라, 개인이 쓸 수 있는 작은 컴퓨터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대기업의 거대한 소프트웨어가 아닌,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꿈꿨다.

    같은 시각, 시애틀에서 멀지 않은 벨뷰의 애플비 애비뉴.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함께 허름한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IBM이라는 거물이 그들에게 연락을 해왔다. “PC 프로젝트에 운영체제가 필요해요. 할 수 있겠소?” IBM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빌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준비돼 있어요.” 사실 준비된 건 없었다. 그들의 회사는 BASIC 언어로 돈을 벌고 있었지만, 운영체제는 손도 안 댄 분야였다.

    “빌, 우리 운영체제 없잖아.” 폴이 전화를 끊자마자 말했다. 그의 눈엔 불안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찾아야지.” 빌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를 뒤지며 말했다.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에 뭔가 있다던데. 팀 패터슨인가 하는 녀석이 만든 거.”

    며칠 뒤, 빌과 폴은 팀을 만났다. 비가 내리는 카페에서 팀은 QDOS에 대해 설명했다. “간단해요. 파일 관리하고, 프로그램 돌리고. 화려하진 않지만 쓸모 있죠.” 빌은 그의 말을 들으며 눈을 빛냈다. “이걸 사겠습니다. 얼마면 됩니까?” 팀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5만 달러면 어때요?” 빌은 속으로 웃었다. IBM과의 계약이 성사되면 그보다 훨씬 큰 돈이 굴러들어올 터였다.

    1981년 여름, 애플비 애비뉴의 사무실은 전쟁터가 됐다. 빌은 팀의 QDOS를 들여와 다듬기 시작했다. 이름도 바꿨다. MS-DOS. 마이크로소프트 디스크 운영체제. 코드 몇 줄을 고치고, IBM의 요구에 맞춰 기능을 추가했다. “이건 단순해야 해. 누구나 쓸 수 있을 정도로,” 빌은 팀원들에게 다그쳤다. 밤낮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들은 MS-DOS 1.0을 완성했다.

    IBM PC가 세상에 나왔다. 1981년 8월 12일, 회색 상자와 함께 MS-DOS가 탑재된 컴퓨터가 상점에 깔렸다. 첫날은 조용했지만,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거 싸고 쓸만하네,” 사람들이 말했다. MS-DOS는 화려하지 않았다. 그래픽도, 마우스도 없었다. 하지만 단순함이 힘을 발휘했다. 프로그래머들은 그 위에 소프트웨어를 얹었고, 회사들은 문서 작업에 썼다.

    팀은 어느 날 TV에서 IBM PC 광고를 봤다. 화면엔 그의 QDOS가 뿌리로 자리 잡은 MS-DOS가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저걸 시작했는데…” 그는 씁쓸히 웃었다. 5만 달러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빌 게이츠가 그걸로 얻게 될 부는 상상 이상이었다.

    빌은 사무실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비는 그쳤고, 시애틀의 하늘은 맑았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그는 중얼거렸다. MS-DOS는 단순한 도구였지만, 그 도구가 세상을 컴퓨터 앞으로 끌고 왔다. 비의 밤에 시작된 작은 코드는 이제 거대한 제국의 첫걸음이 되었다.

  • 프로그래밍은 사고의 예술이다

    프로그래밍은 사고의 예술이다

    프로그래밍은 흔히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컴퓨터라는 기계에 명령을 내리고, 정확한 문법과 논리를 따라 코드를 작성하는 일. 겉보기에는 이성과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프로그래밍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를 정의하고, 본질을 꿰뚫어보며, 창의적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다. 바로 사고의 예술이라 부를 만한 작업이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며, 감정이나 사고를 표현하는 행위다. 프로그래밍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프로그래머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수한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며, 가장 효율적이고 우아한 해법을 찾아낸다. 코드 한 줄 한 줄은 단순한 명령어의 나열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의 결과물이며, 창조적인 결단의 흔적이다.

    프로그래밍의 시작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다. 그것은 단순히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왜 이 문제가 발생했는가?”, “이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른 방식으로 정의할 수는 없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다. 이는 마치 철학자의 사유처럼 깊고 본질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요구사항 이면의 구조와 관계를 파악하고, 필요한 개념을 정제해나가는 것은 순전한 ‘사고’의 영역이다.

    그다음은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이는 작곡가가 악보를 구성하거나, 건축가가 설계도를 그리는 것과 같다. 데이터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각 기능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고 상호작용할 것인가? 모듈은 어떻게 나누고, 책임은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이 모든 과정은 창의성과 논리의 균형 위에서 이루어진다. 똑같은 기능을 구현하는 수십 가지 방법이 존재하고, 그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개발자의 미적 감각과 경험, 그리고 문제 해결에 대한 철학에 달려 있다.

    실제로 뛰어난 코드는 예술 작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불필요한 반복 없이 간결하며, 구조는 명확하고, 이름은 직관적이고, 흐름은 유려하다. 누가 보더라도 이해하기 쉬운 코드, 읽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코드에는 프로그래머의 고뇌와 사고, 미학이 담겨 있다. 반대로, 복잡하고 난해한 코드는 작가의 서투른 문장처럼 느껴진다. 프로그래밍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글쓰기일 수 있다.

    더 나아가, 프로그래밍은 사람과 기계, 그리고 세상을 연결하는 언어다. 프로그래머는 현실의 복잡한 시스템을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논리 구조로 바꾸고, 인간의 필요를 알고리즘과 데이터 구조로 해석한다. 이 과정은 창의적인 번역이며, 해석이며, 해석의 예술이다. 코드는 단지 컴퓨터를 위한 언어가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도구인 셈이다.

    물론 프로그래밍에는 엄격한 규칙과 문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캔버스의 크기, 음계의 제한처럼 오히려 창작을 자극하는 틀이 된다. 제약 속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 복잡함 속에서 단순함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프로그래머의 역할이다.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시스템을 구성하며, 사용자 경험을 고려하는 모든 과정은 논리와 감성, 분석과 직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프로그래밍은 단지 기계를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고, 생각을 구현하는 도구다. 코드 한 줄을 짜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질문을 던지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실패하며, 다시 생각하는가. 이 모든 과정은 사고의 여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래밍은 사고의 예술이라고. 그리고 이 예술을 잘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기술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을 던지는 힘이다.

  • 율리우스 적일

    율리우스 적일

    쥴리안 데이(Julian Day, JD), 또는 율리우스 적일(積日)은 천문학에서 시간을 계산하는 데 사용되는 연속적인 날짜 체계로, B.C. 4713년 1월 1일 그리니치 정오(세계시 12시)를 기준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경과한 날수를 나타냅니다. 이 기준 시점은 율리우스 주기(Julian Period)의 시작으로 정의됩니다.
    JD 2451545.02000년 1월 1일 12시(UT)로, 천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준점(J2000)입니다.

    JD는 날짜와 시간을 하나의 실수값으로 표현하며, 정수 부분은 날짜를, 소수 부분은 하루 내 시간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JD 2451179.5는 1999년 1월 1일 0시(UT)를 의미하고, 여기서 2451179는 쥴리안 데이 넘버(JDN, Julian Day Number)로 정수 부분만을 가리킵니다.
    시간 단위로 소수점 이하를 계산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JD 2451179.75는 같은 날 18시(0.75 × 24시간)를 나타냅니다.

    천문학에서 천체의 운동, 궤적 계산, 관측 시점 비교 등에 사용됩니다. 연속적인 날수 체계는 달력의 복잡한 윤년 규칙이나 월별 일수 차이를 피할 수 있어 계산이 간편합니다.
    예를 들어, 두 천문 사건 간의 시간 간격을 계산할 때 JD를 빼기만 하면 됩니다.

    JD는 율리우스력(Julian Calendar)이나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JD는 단순히 날수를 세는 방식이며, 달력 체계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JD는 세계시(Universal Time, UT)를 기준으로 하며, 다른 시간 체계와의 변환 시 시간 차이를 고려해야 합니다.

  • 카르다쇼프 척도: 문명의 에너지 수준

    카르다쇼프 척도: 문명의 에너지 수준

    우주를 떠올리면 끝없는 별과 은하, 그리고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앞선 외계 문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빠지곤 하죠. 이런 상상을 과학적으로 정리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카르다쇼프 척도(Kardashev Scale)예요. 이 척도는 문명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에너지 활용 능력으로 측정하는 흥미로운 도구입니다.

    카르다쇼프 척도란?

    카르다쇼프 척도는 1964년 소련 천문학자 니콜라이 카르다쇼프(Nikolai Kardashev)가 제안한 이론이에요. 그는 문명의 발전 정도를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과 출처로 정의했어요. 쉽게 말해, 문명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컨트롤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기술 수준을 나눈 거죠. 이 척도는 총 세 단계로 나뉘는데, 각 단계마다 문명이 다룰 수 있는 에너지 규모가 엄청나게 커져요.

    유형 I: 행성 문명

    첫 번째 단계는 유형 I 문명이에요. 이 문명은 자기 행성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을 뜻해요. 태양빛, 바람, 파도, 화산 같은 자연 에너지를 완벽히 통제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예를 들어, 지구 전체에서 태양이 보내는 에너지는 약 1.74 × 10¹⁷ 와트인데, 유형 I 문명은 이걸 전부 쓸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인류는 여기서 얼마나 가까울까요? 과학자들은 현재 인류를 유형 0.7 정도로 봐요. 화석 연료나 재생 가능 에너지를 쓰고 있지만, 아직 행성 전체의 에너지를 완벽히 활용하는 수준은 아니에요. 그래도 기술이 발전하면서 언젠가 유형 I에 도달할지도 모르죠!

    유형 II: 항성 문명

    다음은 유형 II 문명으로, 이 단계에선 문명이 자기 행성을 넘어 태양 같은 항성의 에너지를 통째로 사용할 수 있어요. SF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다이슨 구체(Dyson Sphere)라는 개념이 여기 해당하는데, 이건 태양을 둘러싸서 그 에너지를 100% 흡수하는 거대한 구조물을 말해요. 이 정도면 에너지 출력이 약 10²⁶ 와트 수준이라, 행성 단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나죠.

    유형 II 문명은 행성을 테라포밍하거나, 우주 여행을 일상처럼 할 수 있을 거예요. 상상만 해도 아찔한 수준이죠. 우리 태양계에서 이런 문명을 찾으려면, 별빛이 이상하게 어두워진 곳을 관측하는 게 단서가 될지도 몰라요.

    유형 III: 은하 문명

    마지막은 유형 III 문명이에요. 이 단계에선 한 은하 전체의 에너지를 장악한다고 상상하면 돼요. 수십억 개의 별과 블랙홀, 은하계의 모든 자원을 활용하는 거죠. 에너지 규모는 약 10³⁶ 와트에 달해요. 이런 문명은 은하 곳곳에 식민지를 만들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기술을 가졌을지도 몰라요. 영화 속 ‘스타워즈’나 ‘듄’ 같은 세계가 이 정도일까요?

    유형 III 문명은 우리가 관측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거나, 너무 고도로 발달해서 흔적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있어요.

    인류의 미래는?

    카르다쇼프 척도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거예요. 유형 0.7에서 유형 I로 가려면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기술을 완성해야 할 테니까요. 유형 II나 III는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지만, 과학과 상상력이 결합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이 척도는 단순히 에너지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문명으로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고민하게 해줘요. 우주 속에서 인류가 어디쯤 서 있는지, 또 어디로 가고 싶은지 상상해보는 재미가 있는 개념이에요. 여러분은 우리가 언젠가 유형 III 문명이 될 수 있다고 믿으세요? 아니면 그 전에 외계의 유형 III 문명을 먼저 만날까요? 상상은 자유니까요!

  • 친구 사이에 키스 정도는 괜찮잖아

    친구 사이에 키스 정도는 괜찮잖아

    어릴 적부터 민수와 지영은 단짝이었다. 둘은 서로를 보면 늘 놀리기 바빴다. 민수가 “야, 너 얼굴 진짜 못생겼다!“라고 쏘아붙이면, 지영은 “너나 거울 보고 말해, 등신아!“라며 받아쳤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자란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모태 솔로였다. 연애? 그건 남들 얘기였다.

    어느 날 저녁, 지영이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오늘 술 마실래?”
    민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웬 술이야?”
    “그냥 심심해서. 빨리 와!” 지영의 목소리는 이미 살짝 들떠 있었다.
    술집에서 만난 둘은 맥주를 들이켰다. 민수는 한두 잔으로 끝내려 했지만, 지영은 잔을 거푸 비우더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술기운이 돌자 지영이 느닷없이 물었다.
    “너, 키스해 본 적 있어?”
    민수는 맥주를 뿜을 뻔했다. “뭐? 아니, 없어. 너는?”
    지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없어. 근데 궁금하지 않아? 키스가 어떤 느낌일까?”
    민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궁금하긴 하지.”
    그런데 갑자기 지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 키스해 보고 싶어…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민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야, 왜 울어? 너 진짜 취했구나!”
    하지만 지영은 고개를 들고 민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우리, 키스해 볼래?”
    민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갑자기?”
    “응, 그냥 호기심에. 친구끼리 해보는 거야.” 지영이 술취한 목소리로 고집을 부렸다.
    민수는 망설이다가 결국 말했다. “알았어, 딱 한 번만.”
    둘은 어색하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2초도 안 되는 짧은 키스였지만, 민수와 지영의 얼굴은 동시에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어땠어?” 지영이 물었다.
    “음… 잘 모르겠어. 이상했어.” 민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지영은 킥킥 웃었다. “나도. 근데 재미있었어.”

    그날 이후, 둘은 호기심에 키스를 몇 번 더 해봤다. 처음엔 “친구끼리 실험이다”라는 핑계였지만, 점점 어색함은 줄고 묘한 설렘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날, 지영이 또 전화를 걸었다.
    “야, 우리 집에 올래? 키스하고 싶어.”
    민수는 웃으며 말했다. “너 또 취했구나.”
    “아니, 안 취했어! 그냥 하고 싶다고!” 지영이 발끈했다.
    민수는 결국 지영의 집으로 갔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둘은 이번엔 좀 더 자연스럽게 키스를 했다. 짧았던 첫 키스와 달리, 이번엔 길고 부드러웠다. 키스가 끝난 후 지영이 물었다.
    “야, 우리 이거 계속 하면 안 돼?”
    “뭘?” 민수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키스. 그냥 친구끼리 하는 거야.”
    민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이상해. 친구끼리 키스는 안 하는 거야.”
    지영은 입을 삐죽이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난 좋은데…”
    그 순간, 민수는 지영의 눈을 바라봤다. 술에 취해 반짝이는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러곤 깨달았다. 자기가 지영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야, 우리 사귀어 볼래?” 민수가 불쑥 말했다.
    지영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갑자기?”
    “응, 너 좋아해.” 민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피식 웃었다. “나도 너 좋아해, 등신아.”

    그렇게, 둘의 사랑은 키스에서 시작되었다. 모태 솔로의 굴레를 벗어난 민수와 지영은 더 이상 서로를 못생겼다고 놀리지 않았다. 대신,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티격태격하는 연인이 되었다.

    끝.

  • 나른한 휴일의 오전

    나른한 휴일의 오전

    햇살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어 눈꺼풀을 간질이는 순간, 시계는 이미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다. 평일이었다면 벌써 세상이 다 끝난 듯한 조급함에 시달렸겠지만, 오늘은 휴일.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조금 더, 그래 조금만 더 누워있기로 한다.

    천장에 그려진 희미한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일렁인다. 어제 읽다 만 소설책이 침대 옆에 놓여있고, 핸드폰에는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쌓여있겠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 느릿한 흐름 속에 몸을 맡긴다.

    기지개를 켜니 등허리가 끈적하게 늘어진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 할까. 아니, 조금만 더. 창밖으로 들리는 새소리가 달콤한 나른함을 더해준다. 행인의 발걸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세상은 이미 깨어났지만, 나의 세계는 아직 반쯤 꿈속에 잠겨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발바닥이 차가운 바닥에 닿는다. 따뜻한 양말을 신을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맨발로 부엌으로 향한다.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순간. 분쇄된 원두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물이 끓는 동안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본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며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 놀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커피 잔을 들고 소파에 몸을 묻는다. 음악을 틀까, 책을 읽을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선택의 자유로움이 오히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게 한다. 결국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쓰면서도 달콤한 이 맛, 혀끝에 남는 여운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머릿속에 어제의 일들이 조각조각 떠오른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 내일로 미뤄둔 약속들. 하지만 오늘은 그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는 날. 시간은 마치 꿀처럼 느릿하게 흐른다.

    문득 배고픔이 느껴진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제 남은 빵과 잼이 눈에 들어온다. 토스터에 빵을 넣고 기다리는 시간마저 느긋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빵이 튀어오르고, 버터가 녹아내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작은 행복이 이런 순간에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창가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으며 생각한다. 점심은 뭘 먹을까, 오후에는 무얼 할까. 계획 없는 하루가 주는 자유로움. 그래,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자. 시간이 흐르고 햇살이 점점 더 짙어질 때, 어쩌면 산책을 나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이 자리에서 온종일 게으름을 피울지도.

    나른한 휴일의 오전, 시간은 마치 멈춘 듯 천천히 흐르고, 그 속에서 일상의 작은 행복들이 반짝인다. 이런 순간들을 위해 우리는 바쁜 나날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