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방의 혁명 : 유닉스 이야기

1970년, 뉴저지의 벨 연구소. 복도 끝에 자리 잡은 회색 방은 늘 조용했다. 형광등이 깜빡이며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 힘든 그곳에서, 켄 톰슨은 낡은 PDP-7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고, 화면엔 끝없이 이어지는 코드가 흘렀다. 옆자리의 데니스 리치는 책상 위에 종이를 잔뜩 펼쳐놓고 연필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섬에 사는 듯 보였다.

“켄, 이거 정말 될까?” 데니스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엔 피로와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안 되면 우리가 만드는 거지.” 켄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툭 던지듯 말했다. 그의 눈빛엔 고집과 장난기가 동시에 빛났다.

몇 년 전, 그들은 멀틱스(Multics)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매달렸었다.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시스템을 쓸 수 있는 꿈의 운영체제. 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무거웠다. AT&T가 자금을 끊자, 멀틱스는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졌다. 그 실패의 잿더미에서 켄은 뭔가를 건져내고 싶었다. 그는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잠든 밤마다 PDP-7을 붙잡고 작은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름은 농담처럼 붙였다. 유닉스(UNIX)—멀틱스에서 ‘멀티’를 빼고 단순함만 남긴, 반항적인 이름이었다.

“멀틱스는 너무 거창했어. 난 그냥 내가 쓰기 편한 걸 만들고 싶었을 뿐이야.” 켄은 어느 날 데니스에게 털어놨다. 그 ‘편한 것’은 곧 두 사람의 집착이 되었다. 데니스는 새로운 언어를 고안해냈다. C언어. 어셈블리어의 복잡함을 덜어내고, 인간과 기계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다리 같은 언어였다. 유닉스는 그 C언어로 다시 태어났다.

회색 방은 점점 활기로 채워졌다. PDP-11이라는 새 컴퓨터가 들어오면서 유닉스는 더 날렵해졌다. 파일 시스템, 파이프, 멀티태스킹—켄과 데니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아이디어를 하나씩 쌓아갔다. 어느 날, 데니스가 파이프 개념을 제안했다. “프로그램들이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게 하면 어떨까? 물이 흐르듯이.” 켄은 즉시 키보드를 잡고 코드를 썼다. 몇 시간 뒤, 그들은 화면에서 명령어가 물 흐르듯 연결되는 걸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벨 연구소의 높은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게 뭐에 쓰이는데?”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유닉스는 공식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그냥 두 괴짜가 낡은 기계로 노는 취미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구소의 특허 부서에서 문서 작업을 자동화할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왔다. 켄과 데니스는 유닉스를 내밀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느리고 비효율적이던 작업이 순식간에 끝났다. 그제야 사람들은 회색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치챘다.

소문은 퍼졌다. 대학, 연구소, 심지어 정부 기관까지 유닉스를 원했다. AT&T는 운영체제를 상업적으로 팔 수 없었기에 소스 코드를 공개했다. 그 결정은 폭발을 일으켰다. 전 세계의 프로그래머들이 유닉스를 뜯어보고, 고치고,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었다. 회색 방에서 시작된 작은 불씨는 거대한 불길이 되었다.

몇 년 뒤, 켄과 데니스는 연구소 창밖을 바라보며 맥주를 들었다. PDP-7은 이제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었고, 유닉스는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게 이렇게 커질 줄 알았어?” 데니스가 물었다.
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그냥 게임 하나 돌리고 싶었을 뿐인데.”

밤이 깊어갔다. 회색 방의 형광등은 여전히 깜빡였지만, 그 빛 아래에서 태어난 유닉스는 이제 세상 곳곳에서 숨 쉬고 있었다. 단순함 속에 숨겨진 혁명, 그건 두 사람의 손끝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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