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 속의 씨앗

1994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가을은 차가웠다. 몬티 위데니우스는 아파트의 작은 방에서 낡은 PC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론 북풍이 몰아쳤고, 화면엔 코드 줄이 깜빡였다. 그의 옆엔 데이비드 액스마크가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몬티, 이게 정말 될까?” 데이비드가 물었다. 몬티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되게 만들 거야.”

몇 년 전, 몬티는 TcX라는 회사에서 데이터베이스를 다뤘다. mSQL이라는 도구를 썼지만, 속도가 느리고 제약이 많았다. “내가 원하는 건 더 빠르고 단순한 거야,” 그는 생각했다. 어느 날 밤, 그는 키보드를 잡고 새 데이터베이스를 짜기 시작했다. 목표는 명확했다. 누구나 쉽게 쓰고, 속도가 빠른 시스템. 이름을 고민하다 딸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MySQL—첫째 딸 ‘My’의 이름을 딴 선물이었다.

몬티는 코드를 썼다. ISAM 엔진으로 파일을 관리하고, 쿼리를 최적화했다. 데이비드는 사업 쪽을 맡았다. “이걸 무료로 주고, 지원으로 돈을 벌자.” 그들의 아이디어였다. 1995년, MySQL 3.11이 세상에 나왔다. 작고 날쌔서, 웹 개발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졌다. “이거 빠르네!” “설치도 쉬워!” 몬티는 미소 지었다. “이게 내가 원하던 거야.”

1998년, TcX는 MySQL AB로 이름을 바꿨다. 몬티와 데이비드는 앨런 라슨을 끌어들여 팀을 키웠다. 오픈소스였지만, 듀얼 라이선스로 돈을 벌었다. 무료로 쓰고 싶으면 GPL, 상업용은 유료. 회사는 스톡홀름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자랐다. 어느 날, 몬티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이건 단순한 소프트웨어가 아니야. 사람들이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을 바꾸는 거야.”

2000년대 초, MySQL은 폭발했다. 인터넷 붐과 함께 웹사이트들이 데이터를 쌓았고, MySQL은 그 중심에 섰다. 페이스북, 유튜브—거대 기업들이 채택했다. 하지만 몬티는 걱정했다. “너무 커지면 자유를 잃을지도.” 그의 예감은 맞았다. 2008년,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MySQL AB를 10억 달러에 샀다. 몬티는 기뻤지만, 불안도 커졌다.

2009년, 오라클이 썬을 인수했다. 몬티의 손에서 MySQL이 떠났다. “내가 만든 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야,” 그는 북풍이 부는 창가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떠났고, 곧 마리아DB라는 새 씨앗을 심었다. 하지만 MySQL은 멈추지 않았다. 오라클 아래서도 진화하며, 전 세계 서버에서 뛰었다.

2015년, 스톡홀름의 겨울. 몬티는 딸 My와 함께 눈 덮인 거리를 걸었다. “아빠가 만든 게 세상에 남았어?” My가 물었다. 몬티는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남았지. 그리고 계속 자랄 거야.” 1994년의 그 방에서 뿌린 씨앗은, 북풍을 넘어 세계를 뒤덮은 나무가 되었다.

2009년, 핀란드 헬싱키의 겨울은 깊고 차가웠다. 몬티 위데니우스는 집 서재에서 낡은 데스크톱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엔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눈을 실어 나르고, 화면엔 그가 14년 전 만든 MySQL 코드가 깜빡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제 그의 것이 아니었다. 오라클이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를 인수하면서 MySQL은 거대한 손아귀에 들어갔다. “내 꿈이 이렇게 끝날 순 없어,” 몬티는 중얼거렸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결심했다. “다시 시작해야 해.” MySQL의 뿌리를 살려 새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름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마리아DB(MariaDB)—그의 막내딸 마리아의 이름을 딴 것. “MySQL이 내 첫째 딸을 위한 거였다면, 이건 마리아를 위한 거야,” 그는 미소 지었다. 자유와 개방의 정신을 지키는,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였다.

몬티는 키보드를 잡았다. MySQL 5.1을 포크(fork)해 코드를 뜯어고쳤다. 속도를 높이고, 보안을 강화하고, 새로운 엔진을 추가했다. “오라클이 닫으려는 문을 내가 열어줄 거야.” 그는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 아리아(Aria)라는 저장 엔진은 원래 ‘마리아’로 불렸지만, 혼란을 피하려 이름을 바꿨다. 그래도 프로젝트의 심장은 ‘마리아’로 뛰었다.

며칠 뒤, 그는 메일링 리스트에 글을 올렸다. “MySQL의 대안, 마리아DB를 시작했어요. 같이 만들 사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 세계 개발자들이 모여들었다. 스웨덴의 해커가 버그를 고쳤고, 미국의 프로그래머가 성능을 개선했다. 몬티는 놀랐다. “이건 나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구나.”

2010년, 오라클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MySQL 사용자들은 불안해했다. “오라클이 문을 잠갔다고? 그럼 우리 문을 열자.” 몬티는 마리아DB를 GPL 라이선스 아래 완전히 개방했다. 같은 해, 마리아DB 5.1이 나왔다.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기업들이 눈을 돌렸다. 위키피디아, 구글—거대 사용자들이 마리아DB를 품었다.

2012년, 몬티는 더 큰 걸 꿈꿨다. “이건 커뮤니티의 것이어야 해.” 그는 마리아DB 재단을 설립했다. 데이비드 액스마크와 앨런 라슨 같은 옛 동료들이 힘을 보탰다. “오라클 같은 거대 기업에 다시 넘어가지 않게 지킬 거야.” 재단은 투명성을 약속했고, 개발은 공개적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흘렀다. 2014년, 마리아DB 10.0이 나왔다. 오라클의 MySQL을 뛰어넘는 기능—컬럼스토어, JSON 지원—이 빛났다. 몬티는 헬싱키의 밤하늘을 보며 맥주를 들었다. “이건 단순한 코드가 아니야. 자유의 증거야.” 커뮤니티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2023년, 오라클의 그늘을 피해 K1 투자 그룹이 마리아DB를 인수했지만, 재단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느 겨울밤, 몬티는 딸 마리아와 창밖을 봤다. 북해 위 별빛이 반짝였다. “아빠가 만든 게 세상을 바꿨다고?” 마리아가 물었다. 몬티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 세상이 같이 만든 거야.” 그 별빛 아래, 마리아DB는 자유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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