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문학

  • 302호

    302호

    새벽 세시, 또 시작됐다.

    쿵. 쿵. 쿵.

    윗층에서 누군가 뛰는 소리. 규칙적이고 집요하게.

    수진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사 온 지 한 달,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같은 소리가 들렸다.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넣었지만 402호는 비어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거짓말…”

    쿵. 쿵. 쿵.

    소리는 점점 커졌다. 마치 수진의 방 천장을 정확히 겨냥해 뛰는 것 같았다. 침대 위로, 책상 위로, 현관 쪽으로. 수진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참다못해 수진은 빗자루로 천장을 쾅쾅 두드렸다.

    순간, 소리가 멈췄다.

    고요했다.

    너무 고요했다.

    그때, 천장에서 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검붉은 액체가 전등 주변으로 번지더니 뚝뚝 떨어졌다. 수진의 이불 위로, 베개 위로, 얼굴 위로.

    똑. 똑. 똑.

    천장에 귀를 대고 듣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바닥에 엎드려 수진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속삭임이 들렸다. 천장 너머에서.

    “찾았다.”

    수진이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천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이 가고, 벌어지고, 그 틈 사이로 무언가의 손가락들이 스멀스멀 기어 내려왔다.

    긴, 너무나 긴 손가락들이.


    다음 날 아침, 관리사무소 직원이 302호 문을 열었다. 실종 신고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천장엔 핏자국처럼 보이는 얼룩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202호 주민이 민원을 넣기 시작했다.

    “윗층에서 밤마다 뛰는 소리가 나요. 두 명이 뛰는 것 같은데…“

  • 어느 가을 오후의 카페에서

    어느 가을 오후의 카페에서

    창가에 앉아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오후, 커피 향기가 은은히 퍼지는 이 공간에서 나는 잠시 세상과 분리된 듯한 고요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바깥의 햇살은 부드럽게 창문을 넘어와 테이블 위에 따스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 계절, 시간은 마치 꿀처럼 느릿하게 흐르는 듯했다.

    그때였다. 유리창 너머로 한 여인이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리고 걸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이며 부드럽게 어깨를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마치 물결치는 검은 비단 같았다.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어 은은한 갈색 빛을 띠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릴 때마다 그림자와 빛이 교차하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녀의 실루엣은 가을 햇살 아래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코트 자락이 걸음에 맞춰 살짝 흔들리며 리듬감 있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입은 코트는 약간 헐렁해 보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부여하는 것 같았다. 가을바람이 불 때마다 코트 자락이 나풀거리며 그녀의 날렵한 걸음걸이에 생동감을 더했다.

    그녀의 걸음은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듯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길가에 핀 작은 꽃을 내려다보는 모습에서 잠시나마 세상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 순간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고, 나는 카페 창문 너머로 그 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반쯤만 보였다. 옆모습이었기에 눈매의 깊이나 입술의 모양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햇살에 비친 그녀의 피부는 투명한 빛을 머금은 듯했다. 가끔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미소를 지을 때면, 그 표정이 마치 따스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미소는 어쩐지 나도 모르게 따라 웃게 만드는 전염성이 있었다.

    그녀의 한 손에는 작은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아마도 방금 어딘가에서 소중한 것을 구매했을까? 혹은 누군가를 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 가방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고 섬세해 보였다. 가방을 들고 있는 손목이 살짝 올라갈 때마다 시계가 햇살에 반짝였다.

    다른 한 손은 자유롭게 흔들리며 그녀의 걸음에 자연스러운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가끔 그 손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섬세함이 느껴졌다. 그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녀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녀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으로 채우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짧은 순간 그녀의 존재는 내 오후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알 수 없는 타인들의 이야기가 우연히 내 시선에 들어와 잠시 감동을 주고 사라지는 것. 나의 이야기와 그녀의 이야기는 이 가을 오후, 이 카페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잠시 교차했다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어느새 그녀는 카페 창문 너머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인상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앞에 놓인 식어가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나른한 오후는 계속되었고, 시간은 여전히 꿀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창밖으로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지나갈 때까지.

  • 7의 여자

    7의 여자

    가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오후,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릿하다. 그 속에서 그녀가 지나간다. 화려하지 않지만, 어딘가 눈길을 끄는 여자. 그녀는 10점 만점에 7점, 사람들 사이에서 ‘7의 여자’라 불리는 이다. 완벽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묘한 매력으로 세상을 사로잡는 그녀. 그녀는 누구보다도 사랑받는다. 왜일까?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외모의 숫자를 넘어,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진실을 품고 있다.
    7의 여자는 눈부신 미인과는 다르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완벽한 대칭을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그녀의 미소에는 살짝 비뚤어진 구석이 있고, 그녀의 눈빛은 때로 맑고 때로 그늘진다.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녀의 얼굴은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풍경 같다. 그것은 화려한 일출이 아니라, 잔잔한 호수 위로 퍼지는 물안개 같은 아름다움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며 완벽함이 아닌, 친근함을 느낀다. 그녀는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은 말한다. “그녀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지 않아.” 10점의 여자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신화 속 여신 같지만, 7의 여자는 다르다. 그녀는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미소 짓고, 버스 정류장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한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묘한 생기가 있다. 그녀가 웃을 때,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진다. 그녀가 말할 때, 그 목소리는 마음 깊숙이 스며든다. 그녀는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나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7의 여자는 자신을 안다. 그녀는 자신이 10점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5점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감추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완전함을 무기로 삼는다. 그녀의 자신감은 과시가 아니라, 조용한 확신이다. 그녀는 세상이 정한 완벽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의 옷차림은 최신 유행을 따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녀만의 색깔이 있다. 그녀의 말투는 세련되지 않을 수 있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된다.
    그녀의 매력은 외모만이 아니다. 7의 여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빛난다. 그녀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진심으로 웃고,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줄 때 마음을 다한다. 그녀는 모든 이에게 다정하지 않지만, 그녀가 베푸는 다정함은 깊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데 탁월하다. 누군가 그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다. 그녀의 조언은 거창하지 않지만, 마음을 어루만진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너는 충분히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그녀 자신에게도 향한다.
    가끔 그녀는 외로움을 느낀다. 세상은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 역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녀는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마음과 함께 걷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혼자일 때도 충만하다. 그녀는 바람 부는 저녁, 창가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며 세상을 바라본다. 그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7점의 여자다.
    7의 여자는 세상의 기준을 넘어선다. 그녀는 10점의 완벽함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7점의 가치를 안다. 그 가치는 숫자로 매길 수 없는, 그녀만의 이야기와 감정, 그리고 삶의 흔적들로 만들어진다.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의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친구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삶의 용기를 주는 존재다. 그녀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당신이 지나친 거리의 한 사람일 수도, 당신이 사랑하는 이일 수도 있다.
    가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은 세상의 모든 7점을 담고 있다. 그녀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그녀는 7의 여자,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존재다.

  • 돌 속의 심장

    돌 속의 심장

    1983년, 영국 케임브리지의 가을은 서늘했다. 소피 윌슨은 어콤 컴퓨터(Acorn Computers)의 작업실에서 낡은 설계도를 펼쳤다. 창밖으론 낙엽이 떨어졌고, 그녀의 손엔 연필이 들려 있었다. “우린 더 작고 강한 걸 만들어야 해,” 그녀는 중얼거렸다. BBC 마이크로로 성공을 맛봤지만, 소피는 한계를 봤다. 인텔의 복잡한 칩은 전력을 잡아먹었다.

    스티브 퍼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피, 새 프로젝트 시작했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RISC로 가자. 단순하고 효율적이야.” 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r—명령어를 줄여 속도를 내는 아이디어였다. 그들은 팀을 꾸렸다. 12명의 엔지니어, 작은 꿈. “이건 돌 속에 숨은 심장이 될 거야,” 소피는 말했다.

    작업실은 곧 전쟁터가 됐다. 소피는 ARM1 설계를 그렸다. 32비트, 최소한의 전력. “배터리로도 돌아가야 해,” 그녀는 강조했다. 1985년 4월, 첫 칩이 나왔다. 스티브가 테스트 보드를 켰다. “작동해!” 숫자가 화면에 떴다. 하지만 어콤은 흔들리고 있었다. 시장은 IBM PC에 쏠렸다. “이걸 어디에 쓰지?” 경영진은 회의적이었다.

    1987년, 위기가 왔다. 어콤은 자금을 잃었고, ARM은 표류했다. 소피는 좌절했다. “내 심장이 이렇게 끝나?” 하지만 올리베티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투자할게요.” 1990년, ARM은 독립했다. Advanced RISC Machines. 애플이 눈독을 들였다. 뉴턴 PDA에 ARM을 심으려 했다. 소피는 미소 지었다. “이제 날아오를 때야.”

    1998년, ARM은 폭발했다. ARM7이 휴대폰에 들어갔다. 노키아, 모토로라—작고 강한 칩은 배터리를 아꼈다. “이건 모바일의 심장이야,” 스티브가 말했다. 썬, 인텔이 복잡한 칩으로 싸울 때, ARM은 단순함으로 이겼다. 회사는 라이선스 모델을 택했다. “우린 칩을 안 팔아. 설계를 팔지,” 경영진은 선언했다.

    2010년대, ARM은 세상을 장악했다. 아이폰, 안드로이드—스마트폰의 90%가 ARM 심장을 뛰게 했다. 소피는 케임브리지의 강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만든 게 이렇게 커질 줄이야.” 2016년, 소프트뱅크가 320억 달러에 ARM을 샀다. “태양이 우리를 삼켰어,” 스티브가 농담했다.

    2023년, 케임브리지의 가을. 소피는 강가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ARM Cortex는 자동차, 서버까지 뻗었다. “돌 속의 심장이 세상을 움직여,” 그녀는 미소 지었다. 1983년의 그 작은 씨앗은, 이제 전 세계의 맥박이 되어 뛰고 있었다.

  • 뱀의 속삭임

    뱀의 속삭임

    1989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겨울은 축축했다. 귀도 반 로섬은 CWI 연구소의 작은 사무실에서 낡은 워크스테이션을 켰다. 창밖엔 운하를 따라 안개가 흘렀고, 그의 손엔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프로그래밍은 더 쉬워야 해,” 그는 중얼거렸다. ABC라는 언어를 다뤘던 그는, 그 잠재력을 사랑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너무 딱딱해. 더 유연한 게 필요해.”

    12월, 크리스마스 휴가였다. 연구소는 조용했고, 귀도는 심심했다. “뭐라도 만들어볼까?” 그는 키보드를 잡았다. 새로운 언어를 구상했다. 단순하고, 읽기 쉽고, 재미있는 것. 이름은 고민 끝에 떠올랐다. 파이썬(Python)—그가 좋아하던 코미디 쇼 ‘몬티 파이튼’에서 따왔다. “코드는 진지할 필요 없어. 웃음이 있어도 돼,” 그는 웃었다.

    귀도는 코드를 썼다. 들여쓰기로 구조를 잡고, 복잡한 문법을 던졌다. “C는 너무 번거로워. 난 사람이 읽기 좋은 걸 원해.” 며칠 만에 첫 버전이 나왔다. 그는 동료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새 언어를 만들었어요. 한번 봐주세요.” 반응은 미지근했다. “ABC랑 뭐가 달라?” 하지만 귀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건 내 취미야. 내가 쓰고 싶어서 만든 거야.”

    1991년 2월, 파이썬 0.9.0이 공개됐다. 뉴스그룹에 올리자, 소문이 퍼졌다. “이거 간단하네!” “코드를 읽는 게 즐거워!” 개발자들이 모여들었다. 귀도는 놀랐다. “내가 만든 뱀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그는 오픈소스로 풀었다. “누구나 고쳐도 돼. 같이 키우자.”

    시간이 흘렀다. 1994년, 파이썬 1.0이 나왔다. 람다, 모듈—기능이 쌓였다. 암스테르담의 운하 옆 카페에서 귀도는 맥주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이건 단순한 도구가 아니야. 사람을 해방시키는 거야.” 하지만 갈등도 있었다. “너무 느려!”라는 비판이 나왔다. 귀도는 어깨를 으쓱했다. “속도보다 명확함이 중요해.”

    2000년, 파이썬 2.0이 나왔다. 리스트 컴프리헨션, 가비지 컬렉션—뱀은 더 강해졌다. 구글이, 유튜브가 파이썬을 품었다. 귀도는 미국으로 옮겼다. 2005년, 구글에 합류하며 그는 말했다. “내 뱀이 세상을 돕고 있어.” 2008년, 파이썬 3.0은 과거를 끊었다. “미래로 가야 해,” 그는 단호했다.

    2018년, 귀도는 리더 자리를 내려놓았다. “난 왕이 아니야. 이건 이제 모두의 거야.” 2023년, 암스테르담을 다시 찾은 그는 운하를 걸었다. 파이썬 3.11이 세상에서 뛰고 있었다. “내가 심은 씨앗이 이렇게 자랄 줄이야,” 그는 미소 지었다. 창밖 안개 속, 뱀의 속삭임은 전 세계로 퍼져 있었다.

  • 태양의 등불

    태양의 등불

    1982년, 캘리포니아 스탠퍼드의 봄은 화창했다. 빈 커프먼은 캠퍼스 근처의 허름한 창고에서 낡은 워크스테이션을 켰다. 그의 옆엔 앤디 벡톨샤임, 스콧 맥닐리, 빌 조이가 서 있었다. “우린 세상을 바꿀 거야,” 빈이 말했다. IBM의 거대한 메인프레임이 지배하던 시대, 그들은 작은 꿈을 꾸고 있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강력한 컴퓨터.

    앤디는 책상에 스케치를 펼쳤다. “워크스테이션 하나로 연구소 전체를 돌릴 수 있어.” 그는 스탠퍼드에서 만든 SUN(Stanford University Network) 설계를 들고 왔다. “이걸로 시작합시다.” 이름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태양처럼 밝고 뜨거운 회사. 그들은 창고에서 첫 기계를 조립했다. Sun-1, 네트워크의 씨앗이었다.

    사업은 폭발했다. 1984년, Sun-2가 나왔다. 빌 조이는 유닉스를 다듬어 Solaris를 심었다. “소프트웨어가 핵심이야,” 그는 말했다. 대학, 연구소, 기업들이 썬의 기계를 샀다. 스콧은 숫자를 보며 웃었다. “우린 IBM을 흔들고 있어!” 1986년, 썬은 나스닥에 상장했다. 창고는 멘로파크의 새 사무실로 바뀌었다.

    1990년대, 썬은 날았다. SPARC 프로세서로 속도를 냈고, NFS로 네트워크를 장악했다. 어느 날, 제임스 고슬링이 찾아왔다. “스마트 기기를 위한 언어를 만들었어요.” 자바(Java)였다. 스콧은 반信반의했다. “이게 돈이 될까?” 하지만 1995년, 자바가 웹을 뒤흔들었다. “이건 태양의 불꽃이야,” 빈이 말했다.

    하지만 그림자도 드리웠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로 시장을 잡았다. “썬은 너무 비싸,”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스콧은 이를 악물었다. “우린 싸구려 안 만들어. 품질로 승부해.” 2000년대, 닷컴 붕괴가 썬을 강타했다.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태양이 지고 있어,” 직원들이 속삭였다.

    2008년,危機가 왔다. 금융위기로 매출이 떨어졌다. 스콧은 회의실에서 말했다. “우린 살아남을 거야.” 하지만 2009년, 오라클이 손을 내밀었다. “썬을 살려주죠.” 2010년, 74억 달러에 인수가 끝났다. 빈은 사무실을 떠나며 중얼거렸다. “내 태양이 꺼졌어.”

    2023년, 멘로파크의 카페. 앤디는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자바는 여전히 뛰고, Solaris는 서버에서 숨 쉬었다. “우리가 만든 등불은 꺼지지 않았어,” 그는 미소 지었다. 1982년의 그 창고에서 켜진 불빛은, 태양이 지고도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 사막 위의 작은 로봇

    사막 위의 작은 로봇

    2003년,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의 여름은 뜨거웠다. 앤디 루빈은 허름한 사무실에서 낡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창밖으론 사막 같은 열기가 퍼졌고, 그의 머릿속엔 꿈이 소용돌이쳤다. “휴대폰은 더 똑똑해질 수 있어,” 그는 중얼거렸다. 블랙베리와 팜은 키보드에 갇혀 있었다. 앤디는 그걸 깨고 싶었다.

    그는 친구들을 끌어모았다. 리치 마이너, 닉 시어스, 크리스 화이트—작은 팀이었다. “오픈 플랫폼을 만들자. 누구나 앱을 얹을 수 있는 운영체제.” 앤디의 말에 리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돈은 어떻게 벌어?” 앤디는 웃었다. “먼저 세상에 뿌리고, 나중에 생각해.”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따왔다. 안드로이드(Android)—로봇을 좋아하는 앤디의 흔적이었다.

    사무실은 곧 전쟁터가 됐다. 앤디는 리눅스 커널을 뼈대로 삼아 코드를 썼다. “가볍고, 유연해야 해.” 그들은 카메라와 휴대폰을 연결하는 소프트웨어로 시작했다. 2004년, 첫 데모가 나왔다. 조잡한 화면에 녹색 로봇이 깜빡였다. “이걸로 뭘 하게?” 닉이 물었다. 앤디는 단호했다. “이건 씨앗이야. 자랄 거야.”

    돈은 문제였다. 자금이 바닥나자, 앤디는 투자자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휴대폰 OS? 시장은 이미 꽉 찼어,”라는 냉소만 돌아왔다. 2005년, 절망 속에서 구글이 손을 내밀었다. 래리 페이지와 에릭 슈밋이 말했다. “우린 모바일의 미래를 봐요. 당신의 꿈을 사죠.” 7월,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앤디는 안도했다. “이제 날아오를 수 있어.”

    구글의 산뷰 사무실로 옮긴 팀은 속도를 냈다. “터치스크린으로 가자,” 앤디는 제안했다. 하지만 2007년, 아이폰이 터졌다. 스티브 잡스의 유리판은 세상을 흔들었다. “우린 뒤졌어!” 크리스가 절규했다. 앤디는 이를 악물었다. “아이폰은 비싸. 우린 싸고 열린 길로 간다.” 팀은 방향을 틀었다. 멀티터치, 앱 스토어—안드로이드는 아이폰을 따라잡으려 뛰었다.

    2008년 9월, T-모바일 G1이 나왔다. 앤디는 뉴욕 발표회에서 무대에 섰다. “이건 안드로이드 1.0입니다.” 화면에 녹색 로봇이 웃었다. 관객은 미지근했다. “아이폰 짝퉁 아니야?” 하지만 개발자들은 달랐다. “이건 내가 고칠 수 있어!” 오픈소스의 힘이 발휘됐다. 삼성, HTC가 안드로이드를 품었다.

    2010년, 안드로이드 2.2 ‘프로요(Froyo)’가 세상을 뒤덮었다. 앤디는 사무실에서 맥주를 들며 팀과 웃었다. “우리가 해냈어.” 아이폰의 맞수로 떠오른 안드로이드는 스마트폰의 절반을 장악했다. 하지만 2013년, 앤디는 구글을 떠났다. “내 로봇은 이제 혼자 걸어갈 거야.”

    2023년, 팔로알토의 카페. 앤디는 창밖을 보며 안드로이드 14를 켰다. 작은 로봇은 사막 위에서 거대한 숲이 됐다. “내가 심은 씨앗이 이렇게 자랄 줄이야,” 그는 미소 지었다.

  • 열흘 밤의 코드

    열흘 밤의 코드

    1995년,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의 밤은 고요했다. 브렌던 아이크는 넷스케이프(Netscape) 사무실의 작은 방에서 낡은 워크스테이션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론 실리콘밸리의 불빛이 반짝였고, 그의 손엔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서른넷의 브렌던은 피곤했지만, 눈은 빛났다. “웹을 살아 있게 해야 해,” 그는 중얼거렸다.

    몇 달 전, 넷스케이프는 Navigator 브라우저로 인터넷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정적인 HTML로는 부족했다. “사용자가 움직이는 걸 원해,” 상사 마크 앤드리슨이 말했다. “자바 같은 걸 브라우저에 넣어.” 자바는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뜨거운 언어였다. 브렌던은 고개를 저었다. “자바는 무거워. 더 가벼운 게 필요해.”

    5월, 명령이 떨어졌다. “새 언어를 만들어. 10일 안에.” 브렌던은 숨을 삼켰다. “열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책상에 앉았다. “단순하고, 유연하고, 누구나 쓸 수 있게.” 그는 Scheme의 함수형 스타일, 자바의 객체지향, Perl의 실용성을 떠올렸다. “이걸 섞자.”

    첫날 밤, 그는 이름을 고민했다. “Mocha? 너무 달콤해.” 커피잔을 보며 웃었다. 사무실은 조용했고, 키보드 소리만 울렸다. 그는 동적 타이핑을 넣었다. “변수가 자유로워야 해.” 이틀째, 프로토타입 기반 상속을 썼다. “클래스는 필요 없어.” 사흘째, 브라우저와 상호작용하는 코드를 짰다. “document.write—이걸로 웹이 춤춰!”

    넷째 날, 피로가 몰려왔다. “내가 뭘 하고 있지?”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일곱째 날, 첫 데모가 나왔다. 버튼을 누르자 경고창이 떴다. “alert(‘Hello!’).” 팀은 놀랐다. “이게 돼?” 이름은 바뀌었다. “LiveScript!” 하지만 썬과의 제휴로 다시 변했다. JavaScript. “자바의 동생 같네,” 브렌던은 씁쓸히 웃었다.

    열흘째 밤, 그는 코드를 끝냈다. 1995년 12월, Navigator 2.0에 자바스크립트가 실렸다. “세상에 나왔어,” 그는 한숨 돌렸다. 하지만 반응은 엇갈렸다. “너무 급하게 만든 거 아냐?” 개발자들은 투덜거렸다. 브렌던은 어깨를 으쓱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돼. 살아남으면 돼.”

    1996년, 자바스크립트는 퍼졌다. 웹사이트가 생동감을 얻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IE에 JScript로 맞섰지만, 브렌던의 씨앗은 뿌리내렸다. 1999년, ECMAScript 표준이 나왔다. “이제 내 손을 떠났어,” 그는 말했다.

    2019년, 마운틴 뷰의 카페. 브렌던은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자바스크립트는 웹의 심장이 됐다. Node.js, React—그의 열흘 밤이 세상을 바꿨다. “내가 만든 괴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그는 미소 지었다. 밤하늘 별빛 아래, 1995년의 그 코드는 여전히 웹을 춤추게 하고 있었다.

  • 기계 속의 유령

    기계 속의 유령

    1936년, 영국 케임브리지의 가을은 축축했다. 앨런 튜링은 킹스 칼리지 기숙사에서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론 안개가 깔렸고, 그의 손엔 연필이 들려 있었다. 스물넷의 앨런은 숫자와 논리에 매혹된 괴짜였다. “기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는 중얼거렸다. 머릿속엔 끝없는 질문이 맴돌았다.

    그는 종이에 기묘한 그림을 그렸다. 테이프와 읽는 머리—가상의 기계였다. “모든 계산을 풀 수 있는 기계야,” 그는 깨달았다. 튜링 머신(Turing Machine)이 태어났다. 그는 논문을 썼다. “On Computable Numbers.” 수학자들은 놀랐다. “이건 이론이 아니야. 미래야.”

    1939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앨런은 블레츨리 파크로 불려갔다. 나치의 에니그마 암호가 연합군을 괴롭혔다. 그는 허름한 오두막에서 팀을 만났다. “우린 이걸 풀어야 해.” 그의 눈은 빛났다. 팀은 반信반의했다. “불가능해요.” 하지만 앨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봄베(Bombe)라는 기계를 설계했다. 톱니바퀴와 전선이 춤췄다.

    밤마다 그는 혼자 앉아 암호를 들여다봤다. “패턴이 있어. 찾을 거야.” 1940년, 봄베가 작동했다. 에니그마가 뱉은 메시지가 해독됐다. “U보트 좌표야!” 연합군은 숨을 돌렸다. 앨런은 웃지 않았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전쟁은 단축됐고, 수백만 목숨이 salva됐다.

    전쟁이 끝난 1945년, 앨런은 맨체스터로 갔다. “진짜 컴퓨터를 만들고 싶어.” 그는 ACE(Automatic Computing Engine)를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웠다. 자금은 끊겼고, 관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튜링, 너무 앞서가요.” 그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이 날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1952년, 어둠이 왔다. 동성애 혐의로 체포됐다. “내가 누굴 사랑하든 무슨 상관이야?” 그는 항변했지만, 법은 냉혹했다. 화학적 거세를 택했다. “내 머리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그의 몸은 약해졌다. 친구들은 떠났고, 그는 고립됐다.

    1954년 6월 7일, 윔슬로의 집. 앨런은 부엌에서 사과를 들었다. 청산가리가 묻어 있었다. “이제 쉴 때야,” 그는 미소 지었다. 서른일곱의 삶이 끝났다. 방엔 미완성 논문이 흩어져 있었다.

    2013년, 영국 여왕이 사면을 내렸다. 세상은 뒤늦게 그를 기렸다. 2023년, 맨체스터의 거리. 앨런의 동상이 서 있었다. 한 소년이 물었다. “저 아저씨 누구야?” 엄마가 대답했다. “컴퓨터를 만든 사람이야.” 바람이 불었다. 기계 속 유령은, 조용히 세상을 바꾼 마법사였다.

  • 창문 너머의 빛

    창문 너머의 빛

    1983년, 레드먼드의 마이크로소프트 사무실은 조용했다. 빌 게이츠는 창가에 서서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 위엔 잡지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엔 애플의 매킨토시가 실려 있었다. 그래픽, 아이콘, 마우스—컴퓨터가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인터페이스. 빌은 잡지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우리도 할 수 있어. 아니, 더 잘할 수 있어.”

    몇 달 전, 그는 팀을 소집했다. “MS-DOS는 충분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창을 열고, 직관적으로 쓰는 걸 원해.” 팀은 반신반의했다. MS-DOS로 돈을 벌고 있었지만, 그래픽 운영체제는 낯선 도전이었다. 프로젝트 이름은 간단했다. 윈도우(Windows). “컴퓨터가 세상을 보는 창문이 될 거야,” 빌은 선언했다.

    개발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폴 마리츠는 팀을 이끌며 밤을 새웠고, 프로그래머들은 MS-DOS 위에 그래픽 껍데기를 얹으려 애썼다. “이건 너무 느려!” 누군가 소리쳤다. 화면에 창 하나 띄우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빌은 회의실을 오가며 다그쳤다. “애플이 우리를 앞서가고 있어. 빨리 움직여!” 그의 목소리엔 조급함이 묻어났다.

    1984년 봄, 첫 데모가 준비됐다. 사무실 한구석에서 빌은 스티브 발머와 함께 화면을 봤다. 마우스를 클릭하자 창이 열렸다. 계산기, 메모장이 나타났다. “됐어!” 스티브가 외쳤다. 하지만 빌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더 부드럽게,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해.” 팀은 한숨을 쉬었지만, 그의 비전을 따랐다.

    애플은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매킨토시가 세상에 나온 뒤, 윈도우가 비슷한 길을 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도둑’이라 불렀다. 빌은 코웃음을 쳤다. “아이디어는 누구의 것도 아니야. 중요한 건 누가 더 잘 만드느냐지.” 법적 다툼이 오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1985년 11월 20일, 윈도우 1.0이 출시됐다. 뉴욕의 발표회에서 빌은 무대에 섰다. “이건 개인용 컴퓨터의 미래입니다.” 화면엔 타일 모양의 창들이 떠 있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MS-DOS의 검은 화면과는 달랐다. 관객은 박수를 쳤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너무 느려,” “매킨토시 짝퉁 아니야?”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빌은 이를 악물었다. “다음 버전이 답을 줄 거야.”

    사무실로 돌아온 팀은 더 독해졌다. 윈도우 2.0, 3.0으로 가며 그래픽은 선명해졌고, 속도는 빨라졌다. 1990년, 윈도우 3.0이 나왔다. 이번엔 달랐다. 사무실에서, 집에서, 사람들이 창을 열고 닫으며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됐네,” 스티브 발머가 말했다.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세상이 우리를 볼 거야.”

    윈도우는 멈추지 않았다. 95, 98, XP로 이어지며, 그것은 단순한 소프트웨어를 넘어 일상의 일부가 됐다. 어느 날, 빌은 레드먼드의 새 사옥 창밖을 봤다. 비는 그쳤고, 햇빛이 유리창에 반사됐다. “창문이 열린 거야,”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1983년의 흐린 날, 그가 꿈꾼 빛은 이제 전 세계로 퍼져 있었다.

    사무실 한구석엔 윈도우 1.0이 설치된 낡은 PC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남아 있었다. 그 작은 창문은 세상을 바꾼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