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부서진다. 차갑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얼굴을 할퀴는데, 이상하게도 그 아픔이 오히려 위안이 된다. 회색빛 하늘과 더 짙은 회색의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은 오늘따라 더욱 흐릿하다. 세상의 끝은 이런 모습일까. 모래알은 차갑고, 젖은 발자국은 금세 지워진다. 인적 없는 이 바닷가에서 나만의, 아니 나와 바다, 그리고 바람만의 대화가 이어진다.
저 멀리,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지점에서 무언가 작은 점이 보인다. 처음엔 갈매기인가 싶었다. 아니, 사람의 형체다. 여자다. 찬바람을 뚫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왜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 나처럼 무언가를 찾으러 왔을까,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걸까.
점점 가까워진다. 검은색 긴 코트가 바람에 나부낀다. 바다를 보는 건지, 모래를 보는 건지, 아니면 그저 앞만 보고 걷는 건지…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리는데, 그녀는 손으로 정리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무심한 걸까, 아니면 그 흩날림마저 즐기는 걸까. 긴 머리카락이 검은 실처럼 허공에서 춤을 춘다. 바다처럼 푸른 스카프가 코트 위에서 파도처럼 일렁인다. 어쩌면 그녀는 바다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오, 생각보다 젊다. 아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바다처럼 깊은 눈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나를 보지 않는다. 아니, 바다도, 하늘도, 그 무엇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자신의 내면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입술은 파르르 떨리는데, 추위 때문일까, 아니면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넘쳐서일까.
그녀의 뺨은 바람에 붉게 물들었다. 손은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넣은 채, 발걸음은 일정하다. 리듬이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음악에 맞춰 걷는 것 같다. 그 음악은 어떤 멜로디일까. 슬픈 발라드? 아니면 고요한 클래식? 어쩌면 바다의 소리와 같은,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의 리듬?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것 같다. 내 호흡이 그녀의 호흡과 겹치는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스친다. 낯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이 묘한 연결감은 무엇일까.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는데, 어쩌면 가장 깊은 곳에서는 같은 이유로 이 겨울 바다를 찾은 건 아닐까.
잠시, 아주 잠시 그녀의 시선이 나와 마주친다. 눈빛에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나도 모르게 같은 동작으로 답한다. 어떤 언어보다 깊은 대화가 오간다. ‘당신도 알고 있군요, 이 겨울 바다의 비밀을.’ 약속이나 한 듯 우리의 시선은 다시 바다로 향한다.
그녀가 지나간다. 코트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내 옆을 스쳐간다. 희미한 향기가 잠시 머문다. 소금기와 뒤섞인 그 향은 무엇일까. 재스민? 아니면 바다 그 자체의 냄새? 그녀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이야기를 새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도가 와서 그 흔적을 지울 테지만.
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어깨는 펴져 있고, 걸음은 여전히 일정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집? 누군가를 만나러? 아니면 또 다른 고독한 해변을 찾아서? 바람은 더 거세지고, 파도는 더 높아진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림 없이 걷는다. 강인함인가, 체념인가, 아니면 그저 무심함인가.
이제 그녀는 다시 작은 점이 되었다. 처음 내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처럼. 점점 더 작아져 결국에는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라진다. 마치 시간의 흐름 속에 녹아든 것처럼. 그녀가 왔던 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파도가 모든 것을 지웠다.
이제 다시 나 혼자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녀의 존재가, 그 짧은 교감이, 이 겨울 바다에 무언가를 남긴 것 같다. 바다는 여전히 차갑고, 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변했다. 마치 오래된 얼음이 조금 녹은 것처럼.
파도가 부서진다. 다시 한번. 그리고 또 한번. 끝없는 순환, 그 속에서 우리는 잠시 만났다가 헤어진다. 그녀는 누구였을까. 어쩌면 나의 또 다른 모습, 내가 되고 싶었던 혹은 두려워했던 나의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잠시 공유한 또 하나의 외로운 영혼일지도.
해가 구름 사이로 잠시 얼굴을 내민다. 바다는 순간 빛나고, 그 빛 속에서 나는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겨울 바다에서 만난 그림자, 그 신비로운 만남이 내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고, 나는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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