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범한 화요일 오후였다. 별다른 일정도 없이 나는 그저 길을 걷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사무실로 향하는 길. 매일 같은 시간에 걷는 그 익숙한 길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적당했다. 그날따라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그때였다. 건너편 인도에서 걸어오는 소녀를 보았다. 짧은 머리, 작은 키, 귀에 걸린 하얀 이어폰. 그녀는 내가 아는 소녀가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나를 멈춰 세웠다. 아마도 그녀의 걸음걸이였을까. 혹은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모양새였을까. 그것은 마치 재즈 연주 중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즉흥 연주처럼 섬세하고도 명확한 무언가였다.
내가 20대 초반에 알았던 한 소녀, H를 떠올리게 했다. 내 친구 K의 여동생이었다.
K와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같은 문학 수업을 들었고, 같은 재즈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고, 가끔 그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그의 집은 역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낡은 2층 주택의 2층을 그의 가족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처음 H를 만난 것은 비 오는 일요일 오후였다. K와 함께 레코드 가게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었다. 작은 키에 단정한 단발머리.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K가 우리를 소개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그녀의 눈은 날카로웠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 동생이야. 고등학교 3학년.”
그녀는 책을 덮고 부엌으로 향했다. 뭔가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녹차 두 잔을 들고 나왔다. 하나는 나에게, 하나는 K에게. 그녀 자신을 위한 차는 없었다.
“차가 식기 전에 마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창가로 돌아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무라카미 류의 <69>였다. 고등학생이 읽기에는 조금 강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었다.
K의 방에서 우리는 새로 산 재즈 레코드를 들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그 앨범이 흐르는 동안 창문 너머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 H가 부엌에서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커피를 내리는 향기가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너희 부모님은?” 내가 물었다.
“주말마다 할머니 댁에 가셔. 나와 동생은 집을 지키고.”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그 후로 나는 종종 K의 집에 놀러 갔다. 대부분은 함께 음악을 듣거나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매번 H는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가끔은 빵을 굽기도 했다. 그녀는 말수가 적었지만, 가끔 내뱉는 말은 항상 정확했다. 그녀의 눈은 늘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K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 사이 우리는 우연히 집에서 단둘이 있게 되었다. 나는 K를 기다리며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고, H는 부엌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커피 마실래?” 그녀가 물었다.
“응, 고마워.”
그녀가 커피를 내려 가져왔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았다.
“오빠는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니네.”
“어, 버릇이야.”
“무슨 책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야.”
“읽어봐도 돼?”
나는 책을 건넸다. 그녀는 책을 받아들고 무작위로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몇 문장을 읽었다.
“‘모든 상실된 것들은 다른 형태로 되돌아온다’ … 정말 그럴까?”
“글쎄, 난 그렇게 믿고 싶어.”
“나는… 잘 모르겠어. 상실된 것들은 그냥 사라지는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떤 쓸쓸함이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내면에 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17살의 소녀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그 후로 K가 없을 때, 우리는 종종 책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고, 재즈에 대해서도 꽤 알고 있었다. 어떤 때는 내가 레코드를 가져가면 함께 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음악에 빠져들곤 했다.
K는 우리가 가끔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H는 그저 ‘귀찮은 여동생’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H는 점점 더 특별한 존재가 되어갔다. 그녀의 날카로운 통찰력, 조용한 웃음, 그리고 가끔 보이는 예상치 못한 장난기까지.
우리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계속되었다. 어떤 날은 K가 수업이 있을 때 일부러 그의 집에 들렀다. H는 항상 그곳에 있었고,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문을 열어주었다.
한번은 그녀의 학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얀 블라우스와 남색 치마.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 안녕.”
그녀의 친구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그저 미소만 지었다.
“우리 오빠 친구야,” H가 설명했다. 그리고는 내게 속삭였다. “여기서 만나면 이렇게 불러야 해.”
그녀는 윙크를 하고는 친구들과 함께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해 여름, H는 대학 입시 준비로 바빠졌다. 우리의 만남은 줄어들었지만, 가끔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언젠가 내 소설을 읽어줄 거야?”
“당연하지. 첫 번째 독자가 되고 싶어.”
그녀는 웃었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내 친구의 여동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젊은 여성으로 보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H는 대학에 합격했고, 나는 졸업 후 회사에 취직했다. K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우리는 서서히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만남은 점점 뜸해졌다.
마지막으로 H를 본 것은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후였다. 우연히 서점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더 성숙해 보였고, 머리도 조금 길어져 있었다.
“오랜만이야,” 그녀가 말했다.
“그러게. 대학 생활은 어때?”
“재미있어. 문예창작과에 들어갔어.”
“꿈을 이루고 있구나.”
“아, 그리고 오빠에게 줄 게 있는데…”
그녀는 작은 노트를 건넸다. 열어보니 손글씨로 쓴 짧은 소설이 있었다. 제목은 ‘오후의 재즈’였다.
“아직 미완성이야. 하지만 언젠가 완성해서 책으로 내고 싶어.”
“기대할게.”
“그럼, 이만 가볼게. 다음에 또 봐.”
그녀는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로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회사를 옮겼고, K와도 연락이 끊겼다. H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간혹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마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그 소녀를 거리에서 보았다. 물론 H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오래전 잊고 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H와 함께했던 조용한 오후들, 재즈 음악, 커피 향, 책에 대한 대화들. 그리고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
젊음은 그렇게 지나간다. 마치 재즈 연주의 한 프레이즈처럼. 순간적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다가, 다음 소절이 시작되면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 멜로디는 어딘가에 남아있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해서 울리고 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길을 건너 사라졌다. 마치 기억 속의 H처럼.
다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H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작가가 되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을까. 그녀가 건네준 노트는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어딘가에 묻혀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의 제목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오후의 재즈’.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한 오후에 흐르는 즉흥적인 재즈처럼, 순간적이고도 강렬했던. 그리고 기억 속에서만 계속되는.
사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창문 너머로 비치는 오후의 햇살이 따뜻했다. 마치 그 시절의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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